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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광복회·독립기념관 공동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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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광복회·독립기념관 공동선정
  • 김명숙
  • 승인 2002.02.04 00:00
  • 호수 4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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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의 독립운동가 한훈 선생
광복단결사대 조직 활동, 신탁통치반대운동
국가보훈처에서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국권회복과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우리고장 인물 한훈(1890. 2. 27 ∼ 1950) 선생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한훈 선생은 1890년 2월 남양면 흥산2리에서 태어나 홍주의병에 참가하여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한 외숙의 영향으로 형과 함께 국권회복운동에 뛰어 들어 홍주의병 가운데 이용규 휘하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홍주의병이 붕괴된 직후 선생께서는 계룡산 신도안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을사5적 처단을 계획하였으나 일경의 탄압으로 그것이 불가능해지자 악질 친일 관리인 직산군수를 처단,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같이할 많은 동료들을 만나게 된다.

그 결과 1913년 채기중과 함께 풍기에서 항일 비밀결사인 광복단을 결성하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광산과 경상도·전라도 일대의 부호들을 대상으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또한 1915년 7월 풍기 광복단이 대구 조선국권회복단의 의병계열 인사들과 합작하여 대한광복회로 발전하자 전라도 지역 책임을 맡아 군자금을 모집하고 순창의 일본군 헌병분대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3·1운동 이후에는 상해 임정요인들을 만나 지원을 약속받아 광복단결사대를 조직하고 김상옥 중심의 암살단과 연합하여 미의원단의 방한을 계기로 조선총독·정무총감 등을 처단하고 식민통치기관을 폭파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비록 거사 계획이 일제의 예비검속에 발각되어 실패하고 말았지만 선생께서는 민족독립과 조국광복에 대한 신념을 잃지 않고 당당한 자세로 재판에 임하여 민족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키셨다.

선생은 광복후에도 광복단을 재건하여 임시정부 중심의 자주적 독립국가 건설을 지향하셨고 신탁통치 반대운동 등을 일으키셨으나 1950년 한국전쟁 중 북한군에 납치, 피살되어 50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셨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으며 지난 해에는 광복단 결사대 학술회의를 개최하여 선생의 업적과 광복단 결사대의 독립운동사적 의의를 재조명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독립기념관과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에서는 선생의 뜻과 공적을 기리기 위한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 관련자료와 사진을 2월 한달간 전시할 예정이다.

남양면 흥산2리 웃말 청주한씨 사당 율리사 옆에 한훈 애국지사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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