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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초리에도 연두잎을 - 고도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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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초리에도 연두잎을 - 고도를 기다리며
  • 청양신문 기자
  • 승인 2024.03.04 11:13
  • 호수 15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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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 세상 둘러보기

송방교를 지나 고리섬들을 걷습니다. 큰길을 벗어나 논길로 내려갑니다. 지난해의 묵은 마른풀과 겨울을 잘 이기고 있는 다년생 풀, 새로 난 일년생 풀들로 논길은 부드럽습니다. 몇 발짝을 걷자 푸다다닥 새들이 날아오릅니다. 
   

파란 하늘 밑에 앙상한 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둥그렇고 넓적한 돌도 있습니다. 기다림을 기다림, 기다림의 무대입니다. 오늘도 ‘고도’를 기다리고, 어제도 ‘고도’를 기다렸습니다. 내일도 ‘고도’를 기다릴 것입니다. 
‘고도를 기다리며’, 4명 연기자의 연기경력이 220여 년에 달한다는, 한국 연극계를 대표하는 80대 노장 배우들의 명품연극이 절찬리에 끝났습니다. 

1953년 1월 파리의 바빌론소극장 무대에서 처음 공연한 ‘고도를 기다리며’는 무대에 오르기 전 여러 연출가로부터 거절을 받았습니다. 배우들로부터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고도’가 무엇인지 도통 감을 잡지 못하였으므로, 무슨 얘기인지 이해가 안 되는 내용이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런 이유로 이 작품이 성공하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지만, ‘광대들에 의해 공연된 파스칼의 명상록’이란 평가로 관객들이 몰리기 시작합니다. 관객들은 기존 극에 없었던 새로운 내용과 형식을 발견하고는, 작품의 구체적인 의미를 발견하려 했습니다. 

‘고도’에 대하여 어떤 이는 ‘신(神)’이라 하였습니다. 교도소에 수감 된 사람들은 ‘자유’로 받아들이며, 연극을 보고는 기립박수를 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죄수들은 ‘바깥세상’ 또는 ‘해방’으로, 배고픈 사람들은 ‘빵’으로, 본인들의 삶에 비추며 열렬한 반응을 보인 것이었지요. 

‘고도를 기다리며’는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사무엘 베케트의 대표작품입니다. 두 방랑자가 ‘고도’라는 실체 없는 인물을 하염없이 기다린다는 내용이지요. 깊은 염세주의 사고와 엉뚱한 유머가 독특하게 뒤섞인 이 작품은 2막의 희비극으로 부조리극의 대명사라 불렸습니다. 부조리극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 파리를 중심으로 등장한 초현실주의적 연극입니다. 이치에 맞지 않는 극작품이라는 의미로, 전통적인 기법을 거부하고 인간 실존의 환상과 몽상적 세계를 묘사합니다.
 
“내가 그걸 알았더라면 작품 속에 썼겠죠.” 원작가 역시 ‘고도’가 누구이며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이 작품에서 신을 찾으려 하지 마라, 그것을 궁금해하는 것 그 자체를 이해할 수 없다. 의미도 찾지 마라, 보는 동안 즐겁게 웃으면 그만이다. 극장에서 실컷 웃고 난 뒤, 집에 돌아가서 심각하게 인생을 생각하는 것은 여러분의 자유다.”라고 하였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관객을 향해 열려있는 작품, 삶의 질곡으로부터 고통받는 이들에게는 생의 비밀을 깨닫게 하는 그 무엇, 그 의미를 밝히지 않음으로써 더 큰 의미를 부여하는, 아무 의미 없는 내용이 계속 반복되는 상황 연출을 통해 자기 삶에서 이방인이 된 느낌을 간접 경험하게 한다는 것이 이 작품의 끌림이라고 몇몇의 평론가들은 말합니다. 

1969년 초연 무대(사진 극단산울림 제공)
1969년 초연 무대(사진 극단산울림 제공)

1969년 서울의 겨울, 한국일보 소극장에서 이 부조리극은 초연됩니다. 나무, 비관주의자와 낙천주의자, 모자와 구두, 약 1천500회 동안 무대는 올 듯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렸습니다. 극은 변함없고 세월만 지났을 뿐인데, 대할 때마다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서울 신촌 와우산 입구의 산울림소극장에서 처음 본 젊은 날의 ‘고도’와 그 뒤로 한참 후에 다시 만났던 ‘고도’, 그리고 또 십몇 번의 겨울을 더 보낸 후에 만나게 된 ‘고도’는 같은 고도이면서 다른 고도였습니다. 차가운 북극성 같기도, 마음이 없는 것 같기도, 살기 위한 방법 같기도 하였지요.
 
“고도씨는 오늘은 못 오지만 내일은 올 예정”이라는 대사로 늘 하루를 마무리하는 두 주인공은 시종일관 얼토당토않은 얘기를 하며 ‘고도’라고 하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 정체불명의 인간을 기다립니다. 끝내 오지 않는 ‘고도’로 매일매일 실망하지만, 그럼에도 언젠가는 올지도 모를 ‘고도’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기다립니다. 

2막에서의 나무는 몇 개의 푸른 잎이 피어 있습니다. 오지 않을 것이라 여겼던 ‘고도’가, 희망이 오고 있음을 나무는 보여줍니다. 느릿느릿 절룩절룩, 오래도록 나무 옆에 두 주인공이 함께 서 있는 모습으로 연극은 막을 내립니다. 오지 않을 수도 있는 희망을 함께 기다리는 모습, 주인공들의 만담 속 ‘고도’는 그들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한 함께 가야 하는 희망, 그런 것입니다. 

식물원길가, 우듬지(나무의 꼭대기 줄기)에 잎이 나지 않는 키가 큰 나무가 있습니다. 이 길을 오다 가며 보는 나무입니다. 우듬지 끝에는 마른 뿌리 같은 나무초리(위초리)가 있습니다. 줄기와 가지마다 소담스레 연두잎이 나고 황금물결을 이루어도 나무초리는 잎이 나지 않았습니다. 지난해에도 지지난해에도요. 봄이 와도,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가도 늘 마른 모양이었습니다. 어느 봄날 아침에 새끼손톱만 한 연두의 잎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하늘을 향한 채, 고도를 기다리는 나무초리입니다. 

우리 또한 늘 저마다의 ‘고도’를 찾아왔고 앞으로도 계속 찾을 것입니다. 나만의 고도, 앞으로 또 찾게 될 고도를 위하여, 산과 들에 물이 오르는 3월을 맞이합니다. 
“두렵겠지만 길게 보라, 희망이란 훈련해야 하는 것이다”- 여권운동가이자 역사가, 비평가인 리베카 솔닛의 희망입니다.      
     <김현락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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