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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이 닿아야 갈 수 있는 곳 – 희양산 봉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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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이 닿아야 갈 수 있는 곳 – 희양산 봉암사
  • 청양신문 기자
  • 승인 2023.11.27 17:11
  • 호수 15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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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 세상 둘러보기

 ‘솔바람 소리 듣는 것 말고는 귀가 시끄럽지 않고/띠 풀로 집을 이은 곳 흰 구름이 깊었네/세상 사람이 이곳 길을 알아 도리어 한스러우리/바위 위의 이끼를 발자국이 더럽히는구려’-최치원 한시 ‘골짜기 절간에 혼자 사는 스님께’ 전문
   

봉암사_극락전
봉암사_극락전

해의 기운이 가득한 산,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의 희양산(曦陽山)자락에 참선승방 봉암사가 있습니다. 신라의 지증대사(도헌)가 879년에 창건합니다. 헌강왕은 ‘봉암사(鳳巖寺)’라는 절 이름을 하사하지요. 이후 고려시대에 정진국사(긍양)가 고쳐 지었으며, 구산선문(九山禪門, 중국 선종이 유입된 후 신라 말~고려 초에 형성된 9개의 산문) 중 하나인 희양산파의 종찰(본거지)로 선도량이 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 불탄 것을 두어 차례 또 고쳐 지었습니다. 그 후 많은 선승이 도를 닦자, 1982년 조계종단으로부터 특별수도원으로 지정됩니다. 일반인의 출입을 막고 수행도량의 분위기를 조성하며, 1년에 하루 ‘부처님 오신 날’만 개방합니다. 

금색전과 삼층석탇
금색전과 삼층석탇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는 우리나라 승려들의 활동을 감시‧감독하며 사찰령을 시행합니다. 호국불교의 성격을 강하게 띤 한국불교를 억압하고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서였지요. 1947년 가을, 성철스님은 일본물에 든 불교를 타파‧정화하고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찾고자 합니다. 결사의 장소를 물색하다 희양산자락 양지바른 명당에 있는 봉암사와 인연이 닿습니다. 우봉‧보문‧자운 스님과 18가지 수행규칙을 제정하여 우리나라 불교의 전통 수행과 정신을 실천하고자 ‘봉암사 결사’를 합니다. ‘부처님 법대로 조사님 가르침대로’ 수행자 본연의 모습을 되찾고자 하였지요(『성철스님 시봉이야기』, 원택지음). 

봉암사는 심층이라는 지방 호족이 도헌에게 와 절을 지어달라 부탁하여 지방호족과 선승이 합심하여 세워진 절입니다. 해발 999미터의 거대한 바위산 희양산은 스님들의 거처가 되지 못했다면 도적의 소굴이 됐을 것이라고 도헌은 말했답니다. 최치원은 희양산을 가리켜 무장한 장수가 말을 타고 다가오는 형상이라 표현했으며, 희양산 중턱의 봉암사부지를 ‘봉암용곡’이라 묘사했답니다. 

대광보전에서 내려 본 남훈루
대광보전에서 내려 본 남훈루

‘남훈루’, 2층의 누각을 가운데로 좌우에 협칸이 이어져 있습니다. 누문 아래로 뒤쪽의 ‘대웅보전’이 보입니다. 대웅보전 앞에서 넓적한 마당을 봅니다. 마당 양쪽으로 발이 길게 늘어진 스님들의 공부 방이 있고 좌우에는 노주석이 놓였습니다. 야간 행사 시 관솔불을 피우는 조명시설이지요. 
 

지증대사탑
지증대사탑

지증대사의 사리를 모신 팔각원당형 ‘지증대사탑’이 대웅보전 옆에 있습니다. 신라 사리탑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층층 기단의 가릉빈가(불경에 나오는 상상의 새)는 8면이 각기 다른 악기를 들고 있습니다. 각각의 면마다 사자상이 다르고, 상층에는 합장 공양하는 선녀의 치맛자락이 바람에 나부끼듯 섬세합니다. 지증대사는 왕사로 임명되지만 사양합니다. 헌강왕은 ‘지증’이란 시호와 ‘적조’라는 탑호를 내리지요.
 
당나라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최치원에게 헌강왕은 어명을 내립니다. 봉암사를 창건한 지증대사의 일대기를 비석에 새겨 넣으라고요. 그렇게 탑비는 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 중 하나가 되었고 지방호족과 선종(禪宗), 산문 개창과의 관계 등 한국 선종 역사 연구자료로 높이 평가받습니다. 신라의 역사와 지역, 문화, 불교사를 엿볼 수 있는 자료이지요.  
  
사각지붕의 아름다운 겹처마, 2층의 작은 목조건물 ‘극락전’입니다, 봉암사는 임진왜란 등 몇 번의 전쟁으로 불탔지만, 극락전과 일주문만은 불타지 않아 현존하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되었다고 전해집니다. 모임지붕의 꼭짓점에 화강석 상륜부를 올려 마치 탑 같습니다. 원래 신라 경순왕(재위 기간 927~935)이 후백제와의 전쟁으로 피난 때 원당으로 사용하였답니다. 문경 가은읍 출신 견훤은 경순왕이 피신해 있던 봉암사를 불 질러 태워버렸지요. 지금의 극락전은 조선 중‧후기에 왕실에서 건립한 원당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불전의 내부 단청은 퇴색되었지만 화려했던 흔적만으로도 장엄합니다. 극락전은 법주사 팔상전과 함께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2개의 목탑형 건축물입니다. 

바위산을 배경으로 주홍색 감과 석탑과 ‘금색전(金色殿)’이 있습니다. 4면의 탱화가 아름다운 법당의 뒷면에는 ‘대웅전’ 현판이 바랜 채 걸려있습니다. 옛 대웅전으로, 법당 안의 비로자나불이 금색이라서 금색전이 되었지요. 인도의 탑에서 유래됐다는 머리 장식이 완전히 남아있는 삼층석탑은 9세기에 세워진 탑으로 추정합니다.

파란 하늘 아래, 회색 바위산 아래, ‘희양산문태고선원’이 노랑으로 눈부십니다. 동쪽으로는 묘유문(妙有門)이, 남쪽으로는 진공문(眞空門)이 있습니다. 참다운 비움으로부터 오묘한 존재인 절대 진리가 드러나는 곳이라지요[진공묘유(眞空妙有)]. 진공문의 양옆 기둥에 주련이 있습니다. ‘입차문내 막존지해(入此門內 莫存知解, 이 문으로 들어올 때는 세상의 알음알이로 해석하려 하지 마라)’. 
팔작지붕의 옆면에는 모든 힘의 원천을 상징하는 흰색 코끼리가 웃고 있습니다. 벽에 나란히 세워 둔 몇 자루의 비, 바람 아닌 낙엽 아닌 마음을 청소하는 빗자루입니다. 

※사산비명: ①문경 희양산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 ②하동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 ③경주 초월산대숭복사비명 ④보령 숭엄산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김현락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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