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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내 품이 좁더라도 안아줄게요 - 순례자의 섬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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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내 품이 좁더라도 안아줄게요 - 순례자의 섬①
  • 청양신문 기자
  • 승인 2023.10.23 11:05
  • 호수 15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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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 세상 둘러보기

신안군 압해도 서쪽 끝의 송공항에서 6시 50분에 출발하는 첫배를 타기 위해 서두릅니다. 물때를 맞춰야만 했기 때문이지요. 해무의 아름다움이나 상큼함은 송공항↔병풍도를 오가는 배의 2층 다인실 마루에 누워 떠올립니다. 천사대교를 멀리서, 가까이서 보며 갑니다. 

신안군 북부 증도면에 있는 기점·소악도는 대기점도·소기점도·소악도·진섬·딴섬을 뭉뚱그려 부르는 이름입니다. 5개의 섬을 합한 면적보다 30배 넓은 갯벌이 둘러쳐져 있습니다. 물이 빠지면 섬과 섬은 노두(섬과 섬을 건너려고 갯벌에 던져 쌓은 바위)로 이어집니다. 하나의 큰 섬이 되지요. 
증도면은 우리나라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여성 순교자 문준경(1891~1950)전도사의 고향입니다. 섬마을 전도자로, 돛단배를 타고 이 섬 저 섬을 다니며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다른 섬으로 시집간 딸과 친정엄마 사이의 소식과 물품도 전달했지요. 섬사람들을 도우며 헌신을 다했던 그녀의 영향으로 신안군에는 많은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증도면은 전국 복음화율 1위 섬으로 주민의 90% 이상이 기독교인이랍니다. 자연스레, 하루에 2번 열리는 바다의 길을 ‘기적의 순례길’이라 부르게 되었지요. 

2019년 5월부터 1년간 국내외 예술가 11명이 5개의 크고 작은 섬에 머물며 곳곳에 작은 예배당을 세웠습니다. 섬에서 얻을 수 있는 재료와 한국적인 소재, 섬사람의 삶과 이야기를 건축 소재로 꾸몄습니다. 예배당마다 예수님 제자 12사도의 이름을 붙였으며, 내부는 2~3명이 바듯 들어갈 수 있는 기도실로 꾸몄습니다. 각기 다른 건축 모양과 실내의 꾸밈이 독특합니다. 예배당 간격은 300미터~1.4킬로미터로 12곳 예배당의 거리는 약 12킬로미터입니다. 조성된 길과 섬을 ‘순례자의 섬’ ‘섬티아고’(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따옴)라 부릅니다. 

작은 야고보의집
9번 작은 야고보의집

건축물의 이름은 기독교적이지만, 기독교도만을 위한 길이 아닌 모든 이의 길, ‘순례자의 길’은 이 계절이라서 더 매력적입니다. 강렬한 색상의 특별한 풍경, 길고 넓은 노둣길, 모퉁이를 돌면 불쑥 나타나는 예배당, 낭만과 생각의 길입니다. 

때론 섬을 가로지르고, 노둣길로 섬과 섬을 건넙니다. 속을 드러낸 바다에 물 대신 사람이, 자전거가 들어갑니다. 말끔한 노둣길 옆으로 20~30년 전 옛 노두의 투박한 흔적도 남아있습니다. 돌을 망태나 바지게에 넣어, 날라 만든 옛길이지요. 
마침 썰물에 맞춰 소악도에 내립니다. 보통은 대기점도에서부터 순례를 시작합니다. 대기점도에 1·2·3·4·5번, 소기점도에 6·7번, 소기점도와 소악도 사이 노둣길에 8번, 소악도에 9번, 진섬에 10·11번, 딴섬에 12번의 예배당이 있어 차례대로 보려 하기 때문입니다. 

10번 유다 타대오의 집
10번 유다 타대오의 집

소악도선착장은 진섬에 있습니다. 10번 ‘유다 타대오의 집’, 칭찬의 집을 첫 번째로 만납니다. 뾰족지붕의 부드러운 곡선에 맞추어 푸른 창문이 있는 작은 예배당입니다. 지붕의 크기가 다른 것처럼 각기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서로 배려하고 칭찬하며 하나의 마음으로 살아가자는 뜻을 담았답니다. 예배당 안과 밖의 푸른 타일이 아름답습니다. 

11번 시몬의 집
11번 시몬의 집

진섬 남단 바닷가 언덕 위에 11번 ‘시몬의 집’이 우뚝하게 있습니다. 새우양식장을 보며 섬을 가로지르니 코스모스 사이로 개선문 모양인 사랑의 집이 보입니다. 큼지막한 조가비를 몇 개 붙인 흰 석회벽에, 문과 창틀을 주황색으로 칠해 밝고 환합니다. 지붕에도 눈 모양의 조각품이 있습니다. 연인에게는 사랑의 개선문이며, 상처가 있는 사람에게는 치유의 공간이 되도록 만들었답니다. 문 없는 내부에 들어서면 바다가 맞아줍니다. 시몬과 주황, 푸른 바다의 노래가, 바람의 노래가 들립니다. 어김없이 찾아올 보랏빛 노을, 상상만으로도 아름답습니다.

12번 가롯 유다의 집
12번 가롯 유다의 집

꼬부랑길과 솔밭, 대나무밭을 지나니 백사장입니다. ‘진섬’에서 뚝 떨어진 건너편 ‘딴섬’ 언덕에 12번 ‘가롯 유다의 집’이 있습니다. 역시 물때를 잘 맞춰야 합니다. 만조에 가까우면 백사장은 다른 노둣길보다 먼저 잠기기 때문이지요. 지혜의 집으로, 가늘고 높이 올린 뾰족지붕과 붉은벽돌의 멋진 예배당입니다. 꿀꽈배기 모양의 종탑에는 순례를 다 마쳤다는 의미로 12번을 친다는 종이 있습니다. 아직 물이 들어올 시간은 멀었지만, 괜히 마음이 급해집니다. 자박자박 모래 위를 걸으며, 뒤돌아보며, ‘지혜’와 ‘유다’를 생각합니다. 유다는 은전 서른 닢에 스승을 배반했지만, 뒤늦게 후회하고 자살을 한 제자로 전해집니다. 물이 들어오면, 가롯 유다는 이곳에서 유배자가 되는 걸까요? 마른 대나무밭 같은 양식장, 파도와 모래와 바닷물과 노을에 갇히는 유다의 집입니다. 시몬의 집과 가롯 유다의 집 사이에 있는 해변은 참 좋습니다. 
진섬에서 노둣길을 걸어 소악도에 옵니다. 섬 사이를 지나는 물소리가 크다 하여 소악도랍니다. 남쪽 바닷가의 둑방에 소원의 집이 있습니다. 9번 ‘작은 야고보의 집’입니다. 물결 같은 부드러운 지붕 선과 커다란 물고기 모양의 스테인드글라스로 창문을 꾸몄습니다. 오두막 같은 예배당 지붕에는 작은 닻도 올려있습니다. 어부였던 야고보, ‘어부의 기도소’처럼 섬사람들의 안녕과 풍요를 소원합니다. 

✽예배당: ‘교회’의 전 용어지만, 굳이 사용합니다.
    <김현락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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