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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향인 기고 - 가을 운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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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향인 기고 - 가을 운동회
  • 청양신문 기자
  • 승인 2023.10.10 11:32
  • 호수 15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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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남 경기도 오마중 교감/ 대치면 상갑리 출신
유철남 경기도 오마중 교감/ 대치면 상갑리 출신
유철남 경기도 오마중 교감/ 대치면 상갑리 출신

할아버지는 말린 고추와 밤을 나무 상자에 넣고 묶으시며 읍내 장터에 내다 팔아서 추석을 보낼 준비를 하셨다. 달은 밤마다 볼수록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우리는 한 달 전부터 오전 수업만 하고 매일 운동장에서 운동회연습을 하였다. 줄 맞춰 서는 법과 행진하는 법 등을 주로 배웠다. 학교의 세 분 선생님들은 한 가지씩 맡아서 지도하셨다. 

담임 선생님이신 정 선생님은 제식 훈련을 맡으셨다. 선생님은 4~6학년들을 키에 맞춰 줄을 세우고 호루라기를 부시면서 줄을 맞춰 걷는 것과 제자리에서 걷는 것을 가르치시고, ‘앞으로 갓’ 뒤로 돌아 갓‘, ‘우향 앞으로 갓’, ‘좌향 앞으로 갓’을 외치셨다. 

아이들은 어디로 갈지 몰라서 우왕좌왕하였다. 그러나 차츰 익숙해졌다. 늦은 시간까지 이어진 연습에서 아이들은 조금이라도 빨라 합격하고 놀려는 욕심에 줄별로 하는 시험을 위해 열심히 연습을 했다. 그래서인지 운동회 사나흘 전부터는 다들 잘하였다. 줄도 잘 맞았다. 가장 어려운 것이 다섯 줄이 직각으로 꺾어지는 행렬인데 그것을 위햇 긴 대나무를 잡고 연습을 해서인지 그야말로 국군의 날에 텔레비전에 나오는 것만큼은 아니겠으나 제법 행렬이 멋이 있어졌다. 

운동회 전날에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제식 훈련을 틀리지 않아야 할텐데.’ 하는 걱정이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 와중에 틀리면 무슨 망신일까 싶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아침밥을 먹으려니 스피커 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학교의 운동회 날입니다. 학생들은 오전 9시까지 모두 학교에 나오기 바랍니다. 부형님께서도 함께 참석하시기 바랍니다.’하는 마이크 소리가 들렸다. 먹던 밥을 남기고 동생들을 데리고 출전하는 장군처럼 집을 나섰다. 뒤에는 할머니 어머니도 따라오셨다. 

학교에 도착하니 불그레하던 운동장에는 하얀 석회 가루로 달리기 길이 선명하게 그어져 있고, 본부석에서 뻗어나간 만국기가 운동장을 가로질러 빗살처럼 펼쳐져 있었고, 스피커에서는 힘찬 행진곡이 나오고 있었다. 발걸음이 가볍고 몸에 기운이 들어갔다. 교문에 쓴 <상갑분교 가을 운동회>라는 광목 글씨에 붉은 햇살이 비춰질 즈음, 학교 운동장 가에는 학부모와 외부에서 온 손님들로 빼곡히 가득 들어섰다. 

아직 어린 은사시나무 아래에는 학부모들이 싸 온 과일과 사탕, 과자들이 펼쳐져 있었고 아이들은 모이라는 선생님의 소리가 들릴 때까지 가족들과 같이 찐 밤, 옥수수, 고구마를 까먹으며 긴장되지만 가장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윽고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다 같이 운동장 가에 있는 청군과 백군의 진영으로 가서 줄을 맞춰서 섰다. 몇 번을 해보았지만 오늘 정말 잘 될지는 모르겠다. 출발하라는 지시에 따라 행진곡에 발을 맞춰 운동장을 한 바퀴 돌아서 운동장 가운데 자기 위치에 섰다. 우리들의 행렬이 지나갈 때마다 운동장 가의 부모님들은 환호성을 지르시고 박수를 치셨다. 그런 모습에 발걸음은 허공을 걷는 것처럼 가볍고 생각이 멈춘 것 같았다. 운동장에 모여서 국민체조를 하고 퇴장을 했다. 

이어서 달리기 공책을 상품으로 주는 개인 달리기였다. 다섯 명이 달려서 1,2,3 등을 가르고 이들에게는 공책을 상으로 주었다. 상을 받을 때마다 엄마한테 가져다드렸다. 셋이 모은 공책이 무거울 만큼 많았지만 엄마는 그저 다치지만 말고 하라고 했다. 흙먼지 가득한 뽀얀 맨발로 뛰는 모습이 안쓰러우셨는지 아직도 뜨근뜨근하게 긴장이 덜 풀어진 발을 어루만져주시고 가져온 사과와 우린 감을 주셨다. 

해가 중천으로 떠오르면서 점심 먹을 준비에 분주했다. 점심은 집에서 갖고 온 도시락이었다. 그 좁은 운동장 화단 안에서 한쪽에 펼쳐 놓고 먹는 밥은 어떤 때보다도 맛이 있었다. 노란 양은 도시락에 가득한 밥과 한쪽에는 볶은 멸치, 그리고 찐 계란은 평소에 자주 먹는 음식이 아니었다. 운동을 하고 나서인지 우리들은 밥과 과일 그리고 옥수수까지 참 많이도 먹었다. 

오후에는 기마전과 마라톤 그리고 계주를 했다. 기마전은 주로 고학년이 참가했다. 상대편의 몸을 완전히 말 아래로 떨어뜨려야 이기는 경기였다. 나는 몸이 무거운 편이라서 가운데 말이었다. 싸움은 몸이 가볍고 운동을 잘하는 친구가 했다. 몇 번의 싸움에서 떨어지지 않고 용케 이겼다. 그리고 끝까지 살아남았다. 선생님께서는 파란 깃발을 들어서 우리 편 쪽으로 흔드셨다. 우리 편은 파란 모자들을 하늘로 던지며 기뻐했다. 

청년 마라톤은 가장 인기가 많은 종목이었다.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우리 동네 형이 두 번째로 들어왔다. 형은 온몸이 땀이 범벅이 되어 있었고 아주 지친 모습이었다. 더구나 맨발이었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들 일어나서 박수를 쳤다. 상품은 커다란 플라스틱 양동이였다. 청년들의 마라톤을 끝으로 운동회가 끝이 났다. 이장님은 칠판 가득 찬조금 내 명단을 작성하셨고, 사과 장수 아저씨도 사과를 다 파셨다. 모두들 기분 좋은 얼굴로 서로 농담을 하시면서 즐거워하셨다. 우리들은 운동장의 쓰레기들을 모두 줍고 나서 폐회식을 마치고 집으로 향했다. 여기저기 다치고 절뚝거리는 걸음걸이였지만 석양의 긴 그림자 만큼이나 즐거운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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