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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린다, 조린다, 갈린다, 올린다 – 녹지마 팥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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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린다, 조린다, 갈린다, 올린다 – 녹지마 팥빙수!
  • 청양신문 기자
  • 승인 2023.08.28 17:16
  • 호수 15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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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 세상 둘러보기


하얗게 펼쳐진 눈밭, 푹 고아 얹은 단팥, 작고 네모진 찹쌀떡, 연유를 붓고 뒤적뒤적, 한순간에 몇 숟가락을 듬뿍 입 안에 넣습니다. 사각사각일 찰나도 없이 머리가 띵 합니다. 시원하고 기분이 좋아집니다. 더위가 달아나고 혓바닥이 얼얼합니다. 

빙수(氷水)는 잘게 부수어진 얼음에 당밀(사탕수수나 사탕무를 설탕으로 가공할 때 부수적으로 나오는 찐득한 시럽)이나 설탕, 그 밖의 감미료를 섞은 얼음과자입니다. 단얼음이라고도 하지요. 

옛 어르신들도 얼음에 대한 마음이 각별했습니다. 고려시대부터 국가 의례로 ‘사한제(司寒祭)’라는 작은 제사를 지냈습니다. ‘사한’은 추위를 관장하는 북방신의 이름으로 현명씨(玄冥氏)라 합니다. 음력 12월 얼음을 떠 빙고에 넣을 때는 장빙제(藏氷祭)를, 춘분날 빙고문을 열 때는 ‘개빙제(開氷祭)’를 지냈습니다. 날이 따뜻하여 강바닥이나 빙벽 등에 얼음이 얼지 않을 때는 ‘동빙제(凍氷祭)’를 지내며 날이 추워지기를 기원했습니다. 사한단(司寒壇)을 설치하고, 돼지 한 마리를 재물로 바쳤습니다. 
  

조선 초, 동빙고(서울 성동구 옥수동)와 서빙고(서울 용산구 서빙고동)에 얼음을 저장하기 위한 빙실을 만들었습니다. 동빙고에 저장된 얼음은 나라의 제향에 사용되었고, 서빙고의 얼음은 궁중의 각 전(殿)과 관아의 백관들에게 공급되었습니다. 춘분에 개빙제를 올린 후에 얼음을 나누어 주었지요. 
5백여 년 지내온 사한제는 1908년 폐지됐습니다. 선조들에게 ‘사한제’는 나라의 제향과 잔치, 여름의 더위를 식히기 위한 얼음을 위한 제의뿐 아니라 자연의 이변을 막기 위한 간절한 바람의 의식이었습니다.
청양에도 빙고가 있었습니다. 신라시대였던 청정현 때부터 있었던 곳으로, 겨울에 얼음을 저장하였다가 여름에 쓰는 창고였지요. 빙고가 있었던 마을을 빙곳재라 부릅니다. 지금의 청양보건의료원 자리쯤에서 청양성당 밑 부근이지요. 

팥빙수는 5천여 년 전 중국에서 눈(雪)이나 얼음에 꿀과 과일즙을 섞어 먹은 ‘밀사빙(蜜沙氷)’이라는 음식에서 시작됐습니다. 밀사는 꿀모래가 아니라, 꿀에 버무린 팥소(豆沙)를 의미합니다. 상류층에 제한된 소수 음식문화였던 빙수는 19세기 말 인공얼음과 제빙기의 등장으로 대중화되기 시작합니다. 이후 잘게 간 얼음에 팥소나 설탕을 시럽으로 뿌려 먹는 형태로 발전합니다. 

우리나라는 조선시대 서빙고의 얼음을 관원들에게 나눠주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잘게 부수거나 얼음 쟁반 위에 과일을 얹어 화채 등으로 먹었습니다. 요즘의 빙수와는 다른 음식이었지만, 얼음을 먹은 선례입니다. 요즘처럼 자잘하게 간 얼음에 차게 식힌 단팥을 올려 먹는 방식은 일제강점기에 시작됐습니다. 

팥빙수는 곱게 간 얼음에 팥과 꿀이나 설탕 등으로 만든 단팥을 얹는 것이 기본입니다. 팥과 연유, 작은 인절미(찹쌀떡) 몇 조각을 얹은 ‘옛날팥빙수’에 과일, 견과류, 젤리나 시리얼 등을 곁들이지요. 
팥빙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팥입니다. 팥 없는 팥빙수, 상상이 안 됩니다. 팥은 동북아시아가 원산지로 재배역사가 오래됐으며, 예로부터 많은 요리의 첨가물로 쓰였습니다. 동짓날 팥죽부터 한여름의 팥빙수까지, 팥고물과 팥소는 떡과 전통과자와 빵 등으로 사계절 내내 팥은 애용됩니다. 
땡팥을 단팥으로 만드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팥을 너무 오래 삶아 퍼지면 안 되기 때문이지요. 어느 정도 삶아지면 설탕을 넣어 달달하게 조려냅니다(늘 ‘어느 정도’가 어려운 일이지요.). 

한여름 밤이면 얼음을 갈아 팥빙수를 한 사발씩 만들어 주시던 할머니표 팥빙수를 생각하며 동화를 쓴 사람이 있습니다. 작가는 팥빙수를 ‘눈호랑이 범벅’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그 여름밤에 잠깐 눈이 내렸던 것 같다고도 합니다. 이 혹자는 덥쑥 어린이동화책을 구입했습니다. ‘팥빙수의 전설’입니다. 깊은 산속에 할머니가 홀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습니다. 수박과 참외가 크고 노랗게 익어가고 딸기도 탱글탱글 잘 키웠습니다. 잘 영근 팥으로 달달구수하게 단팥죽도 쑤었습니다. 단팥죽과 과일보따리를 등에 지고 할머니는 장에 갑니다. 반쯤 갔을라나, 갑자기 눈이 펑펑 내립니다. “요렇게 따스한 날에 눈이 오면 눈호랑이가 나온다고 했거든….” 크르르르릉 새하얗고 커다란 눈호랑이가 떡하니, 정말 나타납니다. 

“맛있는 거 주면 안 잡아먹지!” 새콤달콤한 딸기를 던져주고, 잘 익은 참외도 던져줍니다. 딸기를 먹고 함박웃음을 웃던 호랑이는 참외의 달콤함에 덩실덩실 춤을 춥니다. 큰 수박까지 다 먹었습니다. 욕심이 끝이 없는 눈호랑이는 급기야 할머니등의 짐보따리까지 잡아당깁니다. 어이쿠! 뜨끈뜨끈한 단팥죽이 눈호랑이의 머리 위로 뒤집어집니다. “맛있드아아--” 눈호랑이는 뜨거운 단팥죽에 사르르르 사르르 녹습니다. 수박과 참외와 딸기가 잘 녹은 눈과 단팥죽에 범벅이 되었습니다. 할머니는 예쁜 접시에 눈범벅을 모아 담아 시장으로 갑니다. 

더위에 지친 순간, 생각 나는 음식 중 하나가 팥빙수입니다. 아침저녁으로는 시원한 바람이 불지만, 한낮은 여전히 완전 땡볕입니다. 눈이 부시고 살갗이 따갑고 머리도 어찔합니다. 그런 때, 한 그릇의 팥빙수는 머리와 가슴을 냉철(?)하게 하지요.  
    <김현락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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