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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 통영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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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 통영 ②
  • 청양신문 기자
  • 승인 2023.08.22 09:53
  • 호수 15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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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 세상 둘러보기

통제영거리에는 통영문화동 벅수가 있습니다. 벅수는 풍수적으로 땅의 기운을 보충하고, 잡귀를 쫓고, 재난을 막아주는 수호신입니다. 1872년에 그려진 통영지도에는 5곳에 있었습니다.

길바닥에 청마의 글을 적은 시판이 드문드문 노랗게 깔렸습니다.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통영우체국 빨간우체통 옆에 유치환의 ‘행복’ 시비가 있습니다. 사랑하였으므로 진정 행복했던 청마(유치환, 1908~1967)의 거리는, 청마와 정운(이영도)의 유명한 연애 장소였습니다. 해방 후 통영여자중학교의 교사였던 청마는 시조시인이며 동료였던 정운을 짝사랑합니다. 정운은 젊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하고 딸과 살고 있었습니다. 청마 역시 기혼자였지요. 청마는 퇴근 후 정운의 수예점이 보이는 우체국 창가에 서서 연서를 씁니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청마는 한국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3년을 거의 빠짐없이 정운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닿을 수 없는 인연의 안타까움을 편지로 달랠 뿐이지요. ‘행복’도 청마가 정운에게 보낸 시였습니다. 교통사고로 청마가 사망할 때까지 편지는 계속 보내졌고, 정운은 그 편지를 꼬박꼬박 보관했습니다. 한국전쟁에 일부는 불타버렸지만, 남은 시 편지만 5천여 통이었습니다. ‘너는 저만치 가고/나는 여기 섰는데…/손 한번 흔들지 못한 채/돌아선 하늘과 땅/애모는 사리로 맺혀/푸른 돌로 굳어라’ 정운도 청마를 잃은 슬픔을 시로 남깁니다.       
중앙전통시장 앞, 바다가 들어온 육지 항구인 강구안은 군항이었습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상업의 중심지로, 충무김밥과 통영꿀빵이 수북이 쌓였습니다. 길로 나온 큰 다라 속에서 꿈틀꿈틀 움직이는 해산물은, 금방 튀어 오를 듯합니다.

통영꿀빵
통영꿀빵

강구안의 동쪽으로 언덕을 오르면 벽화마을 ‘동피랑’입니다. 주택가 담벼락 대부분을 예쁘고 앙증맞은 그림으로 그려놓았습니다. 야외 미술관입니다. 수많은 색과 글로 칠해진 골목을 따라 언덕을 오릅니다. 강구안 일대가 훤히 보이고, 둥그렇게 갇힌 물결도 푸르고 잔잔합니다. 골목길 언덕배기를 미끄러지듯 내려오니 바다 비린내가 훅 밀려옵니다. 
맛과 향이 좋다는 성게알비빔밥, “예전에는 이 골목에 사람이 치여 다니질 못했어요. 우리 집 대기표가 200번이 넘을 때가 많았지요. 맛집입니다. 성게맛집요!” 동피랑은 2007년에 한 시민단체에 의해, 마을의 벽을 색칠하는 전국벽화공모전을 열면서 벽화마을로 탈바꿈하였습니다. 동피랑의 벽화들은 구간을 정해 2년 주기로 그림을 새로 그리는 작업을 합니다. 
  

윤이상 기념관
윤이상 기념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 통영항이 한눈에 내려 보이는 봉평동은 꽃의 시인 김춘수(1922~2004)의 고향입니다. 바다는 유년이었고 또한 무덤이었다는 김춘수는 바다, 특히 통영바다를 엄청 좋아했습니다. 통영의 부잣집 장손으로 태어나, 예사로운 현실이 늘 낯설었습니다. 땅으로 귀양 온 천생의 시인은 통영에 유난히 많은 동백을 ‘산다화’라 부르며 시를 썼습니다. ‘시인 김춘수 생가길’의 빨간 나무의자에 앉은 시인은, 본인의 시들이 적힌 호화로운 벽화를 보고 있습니다.     
통영시 남동쪽에 있는 한산도의 수루에서 본 바다는 백석이 아니더라도 쇠리쇠리합니다(눈이 부십니다). 선착장에서 제승당으로 가는 길은 한쪽은 해안길, 다른 한쪽은 울창한 솔숲입니다. 오래된 적송의 군락지가 넓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과 판옥선을 만들 때 한산도의 적송을 썼습니다. ‘승리를 만드는 집’ 제승당은 충무공의 집무실입니다. 이곳에서 참모들과 작전을 짜고, 거북선을 그리고 난중일기를 썼습니다. 한산도 앞바다가 훤히 보이는 ‘수루’에 서서 충무공은 시를 읊었습니다. 거북선등대가 희미해지니, 남망산에 불빛이 반짝입니다. 오징어잡이 배도 반짝 불을 켭니다. 가스등 아닌 가스등 밑을 이방인들이 걷고 있습니다. 

동피랑의 골목 벽화
동피랑의 골목 벽화

13살의 윤이상(1917~1995)은 본인 작품이 영화관에서 연주되는 것을 듣고 작곡가의 꿈을 키웁니다. 고향 밤바다의 고기가 뛰는 소리와 어부들의 노랫소리로부터 윤이상의 음악은 출발합니다. 항일운동 중에도 그는 유일한 재산이고 벗이었던 첼로와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40대부터 독일 유럽 현대음악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합니다. 50대에는 동베를린사건의 누명을 쓰고 수감생활을 합니다. “이제부터 한국의 하늘은 깊은 푸른색! 조국의 하늘! 이 하늘과 이 조각달과 단풍, 이것만 가지고도 나는 내 땅을 무한히 사랑할 수 있소.”-옥중편지(1968.10.)

첼리스트이며 바이올리니스트, 작곡가인 윤이상은 독일 정부와 동료 음악가와 예술가들의 국제적 항의로 2년 만에 석방됩니다. 필생의 염원이 ‘민족통일’이었던 윤이상은, 분단 45년 만에 남북한의 음악 교류를 성사시킵니다. 세계적인 음악가는 고향 땅의 따스함 속에 묻히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합니다. 사후 23년 만에 베를린시의 양해를 얻어 고향으로 이장됐지요. 
음악상자에 종이 악보를 넣고 돌립니다. 조지훈의 시 ‘고풍의상’이 윤이상의 곡조를 타고 흘러나옵니다. ‘~열두 폭 기인 치마가 사르르 물결을 친다~’     
    <김현락 편집주간>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 김훈, ‘칼의 노래’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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