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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양신문 기자
  • 승인 2023.08.14 10:07
  • 호수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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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비눌에 하이얀 햇볕만 쇠리쇠리하야 - 통영 ①

‘충렬사의 동백나무 밑까지 온 용옥은 이슬에 젖은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충렬사 사당이 반쪽 난 달빛에 흠씬 젖어 있었다. 꿈 같이 거짓말같이 밤이 적막 속에 묻혀 있었다. 나뭇잎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풀벌레가 울어도 그 소리는 적막을 더할 뿐이다. 달이 희미해지고 서문고개에 가려진 남쪽 하늘이 희뿌예졌을 때 물동이소리와 발소리가 적막을 깨친다. 명정골 우물에 물 길러오는 소리다.’-박경리의 소설 『김약국의 딸들』 본문 중, 김약국의 넷째딸 용옥이 욕정에 눈이 뒤집힌 시아버지를 피해 집을 뛰쳐나온 장면. 

통영, 충청·전라·경상도 3도의 수군을 총괄하는 ‘삼도수군통제사영’을 줄여 부르던 것으로 ‘통제사영, 통제영’에서 유래 됐습니다. 1604년에 한산도에서 현재의 지역으로 통제영이 옮기면서, 남쪽바다를 지키는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명정동의 간창골길로, 서문길로, 충렬길로, 붉은 서문고개를 오릅니다. 담 넘은 연두색 무화과 열매는 배냇짓 하는 갓난아이처럼 예쁩니다. 손바닥을 쫙 편 크기로 ‘박경리 선생 태어난 집’ 안내판이 붉은 벽돌담에 붙어있습니다. 저쪽(산양읍)에 박경리문학관이 있다고는 해도 참 소박합니다. 일부러 찾지 않는다면 그곳을 몇 번 지나도 그냥 지나치고 말 것 같습니다. 

1872년 통영지도(규장각 소장)
1872년 통영지도(규장각 소장)

서피랑은 소설과 시와 사랑의 장소입니다. 박경리 소설 『김약국의 딸들』의 공간 배경인 곳으로, 김약국과 그의 딸들이 오르내리던 골목과 고개와 마을입니다. 청마 유치환이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수천 통의 편지에 담아 보내던 곳입니다. 백석 시인이 짝사랑 마음을 낮술로 달래던 곳입니다. 예전에 이 일대는 뱃사람들이 술잔을 기울이던 홍등가가 있던 ‘야마골’이었습니다. 광복 후 집창촌이었다가 1990년대 후반에 자연스레 사라졌습니다. 달동네였던 서피랑은 2013년에 주민들이 나서서 새로운 마을만들기를 추진하였습니다. 지역 예술가들이 벽화를 그리고, 거리 곳곳에 예술 작품을 설치했습니다. 공포의 계단이라 불렸던 99계단은 서피랑을 유명하게 하며, 문화배수지가 형성되었습니다.

뚝지먼당길로 서피랑을 오릅니다. 옛날에는 서문 안에 둑사(纛祠, 뚝사)가 있었습니다. ‘뚝’은 깃발을 의미하며 뚝사는 삼도수군통제사의 깃발 중 최고인 원수(元帥)기를 모셨던 사당이었습니다. ‘먼당’은 산마루를 뜻하는 사투리입니다. 사당이 있던 산마루는 이 지역 일대에 물을 공급하는 배수지가 되었습니다. 높은 배수지 담벼락에 박경리의 문장들이 물결처럼 써(그려)있습니다. 평화롭게, 때로는 쓸쓸하게. 

서피랑 정상은 공원입니다. 공원 중앙으로 서포루가 복원되었습니다. 서포루에 앉아 미륵산과 남망산과 주먹만한 공주섬을 봅니다. 통제영 본부 세병관도 보입니다. 
통제영 방어를 위한 통영성을 1678년에 쌓았습니다. 동서남북 4대문과 동서 2암문, 3포루, 3연못, 9우물이 있었습니다. 통제영 본부 세병관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동피랑 동포루, 북쪽에는 여황산 북포루, 서쪽으로는 서피랑 서포루가 있었습니다. 서포루는 성의 끄트머리로 ‘성날’, 서산(西山)이라고도 불렀지요. ‘피랑’은 절벽·벼랑의 순우리말입니다.

명정골은 우물이 있어 생긴 이름입니다. 명정은 충렬사 아래쪽에 있는 정당새미(샘)로 2개의 우물이 있습니다. 일정(日井)과 월정(月井)으로, 그 이름의 일(日)과 월(月)을 합해 명정(明井)입니다. 심한 가뭄이 들어도 물이 마르지 않았습니다. 명정골에서 박경리는 어린시절을 보냈습니다.      

‘~명정(明井)골은 산을 넘어 동백(冬栢)나무 푸르른 감로(甘露) 같은 물이 솟는 명정(明井)샘이 있는 마을인데/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 백석, ‘통영2’ 부분

백석은 친구의 결혼식에서 통영아가씨 ‘란’을 보자마자 첫눈에 반합니다. 1월에도, 3월에도, ‘란’을 만나기 위해 몇 번이나 통영에 왔지만 만나지 못합니다. 어느 하루도 서운한 마음으로 낮술을 하고는 충렬사계단에 앉아 시를 씁니다. 머리가 까맣고, 눈이 크고 코가 높고, 목이 패고, 키가 호리낭창한 처녀 ‘란’을 백석은 깊이 좋아했습니다. ‘란’은 동지섣달에도 눈이 오지 않는 낡은 항구의 크나큰 기와집에서 그늘진 풀같이 살아왔지요. 먼 길을 왔지만, 명정골 그녀의 집에는 찾아가지 못합니다. 혹 그녀가 물이라도 길러 오지 않을까, 명정 앞에서 종일 차가운 바람만 맞으며 기다립니다. 

이순신 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 ‘충렬사’를 올려보는 길가에 백석의 시비가 있습니다. 이충무공 위패를 모신 정당(正堂) 뒤로 대나무가 푸른 바람을 냅니다. 강한루(江漢樓)에 오릅니다. 400여 년 넘게 꽃을 피운 2그루 동백나무를 내려보며, ‘란’을 생각합니다. 명정골 서피랑와옥 하동집(『김약국의 딸들』에 나오는) 기왓장에 붉은 노을이 내립니다. 동백꽃처럼 핍니다.      
     <김현락 편집주간>

백석 시 ‘바다’ 부분. 쇠리쇠리하야: 눈이 부시다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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