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4 15:03 (수)
세월 잡고 늘어질까, 그리움 잡고 늘어질까 - 은항(銀缸) 이우재
상태바
세월 잡고 늘어질까, 그리움 잡고 늘어질까 - 은항(銀缸) 이우재
  • 청양신문 기자
  • 승인 2023.08.07 11:45
  • 호수 15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만나고 싶은 청양인

아담하고 아름답고 정이 넘치는, 참마음을 다지는 곳, 운곡면 미량리 은항골은 이우재(1930~) 문학박사의 자랑스러운 고향입니다. 여러 개의 호(號) 중 고향마을의 이름을 따서 지은 항아리항 ‘은항’을 가장 좋아합니다. 

“해방되던 해 밤 두 말 가지고 서정석 형님을 따라 서울로 왔어요. 일본서 살다 돌아온 서정석 모친과 우리 어머니가 미량리에서 친하게 지내셨거든요. 당산동 서정석 형님네서 묵으며 국수공장에 다니다 신문배달모집 광고를 봤어요. 서울신문이었는데, 편집국장(안준) 부인이 “이름 명패가 다 한문이어서 너는 못 한다”는 거예요. 서당에 다녀서 한자는 다 안다고 했더니 고향이 어디냐 물어요. 청양이라 하니 본인은 서산이라며, 남편이 퇴근할 때까지 기다려보잡니다. 편집국장 역시 나를 보자마자 아직 어리기도 하고 안 된답디다. 부인이 자꾸 우기니 마지못해 한문글자 몇 개를 물어요. 글자를 다 맞추니 “몇 살이냐?” 묻고는 신문구독자 명단을 내놓는 거예요. 300명을 한 사람 틀리고 다 맞추니 어디서 그렇게 한문을 배웠냐네요. 운곡에서 5살부터 10살까지 한문 서당을 다녔거든. 편집국장집에서 밥 얻어먹으며 한 달 반인가 두 달 정도 신문 배달을 하는데, 하루는 편집국장이 나를 데리고 영등포공업학교에 가요. 학교 들어갈 시기를 놓쳤다며 교무과장이랑 얘기하는 것을 그 학교 김규현 교장이 봤어요. 그리고는, 우중충한 나에게 몇 마디 물어보더니, “얘 10원 한 장 받지 말고 입학시켜라”며 교무과장한테 특명을 내려요. 그렇게 신문 배달을 하며 중‧고등학교를 다녔지요. 당산동 적산가옥 다다미방에서 자췰했는데, 딱 소금 한 가지로 밥해 먹었죠. 시골서 1전 한 푼 받은 적 없고 6년 신문 배달해서 성공한 거죠” 

꿈, 교육자
“한문을 5년 배웠으니 공부는 잘했지요. 졸업 후 육군헌병학교에 합격하니 현수막이 영등포공고 정문에 딱 붙었어. 그때 헌병학교에 2명이 합격했는데, 기적이지. 거기서부터 내 인생이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많이 다쳤습니다. 책도 많이 읽었습니다. 배속장교로 청양농고에서 체육교사를 했습니다. 회의 참석차 부산 가는 길에서 우연히 김규현 교장을 만나 모교인 영등포공업중고등학교로 옮깁니다. “너 글 잘 쓰니 진학해야 하지 않느냐”는 교장의 권유로 서라벌대 문예창작과에 입학합니다. 

“내가 육군중위 군복을 입고 교정을 씩씩하게 다니니 서라벌학교 설립자가 제대는 했느냐고 묻는 거예요. 아직 등록금을 못 냈다 했더니, 그 양반이 총무처에 “얘 등록금 내 월급에서 뗄 테니 대 줘라” 하여 등록금을 해결하고 학교를 다녔어요. 초급대학을 졸업하고 서라벌고 국어강사를 했는데, 한문을 많이 알고 있어 가능했지요.” 
교직자의 꿈을 이뤄나갑니다. 강사를 하며 공부를 하며, 교사발령을 정식으로 받았습니다. 천안여고에서 서울의 미아리 서라벌예고까지 하루에 두 학교를 오가며 돈을 벌었습니다. 

“네 얼굴이 좋고 마음씨가 괜찮으니, 미국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있으면 좋겠다” 김규현 교장의 말처럼 미국에서 공부할 기회도 생겼습니다.
“내가 미국에 가서 쇼크를 받았어요. “여기서 공부는 하되 보직은 어렵겠다”고 그쪽 교무주임이 말하는데…, 영어가 션찮으니 그 정도 실력으로는 안 된다는 거지.” 서라벌예고에 교장으로 발령받을 기회가 있던 어느 날, 광운대 전무이사가 찾아옵니다. 교장보다는 대학교수가 낫지 않느냐는 제안을 받습니다. 배속장교에서부터 광운대학교까지 43년간 교단에 섰습니다. 꿈을 제대로 이룬 것이죠.  

이우재 박사 즉석시
이우재 박사 즉석시

그리움을 많이 타는 시인
시조시인, 수필가, 사진작가, 여행가, 교육가, 서예가 등 여러 호칭이 있지만 통틀어 ‘문학박사’로 불리기를 좋아합니다. 그중 가장 좋아하는 것은 시조입니다. 육당 최남선, 가람 이병기, 노산 이은상의 시를 좋아합니다. 
“최남선의 시가 최고지 최고. 기가 맥혀. 최남선은 『백팔번뇌』에서 ‘시조로 표현 못 할 것은 없다’고 했으니까. 육당의 신체시(新體詩, 개화기 시가의 유형으로 한국 근대시에 이르는 과도기적인 형태의 시가로 ‘신시’라고도 부릅니다.) 발표는 문학사의 의의뿐만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제시로 누구도 하기 힘든 놀라운 업적이지요.” 

이우재 박사의 훈장, 시비(詩碑), 문학상, 창작집 등 모든 부문 앞에는 ‘많은’이 붙습니다. 운곡초등학교의 ‘교가’를 비롯하여 조가(弔歌), 찬가, 선심가, 연대가 등 가곡의 노래글도 많습니다. 36살의 첫 시조‧수필집인 <은항의 나그네길>부터 82살에 작업한 겨레시집 <푸른 칠갑산 시인>까지 백 수십 권의 책을 발간했습니다. “사실 책은 3백 권도 넘게 냈는데, 귀찮아서 정리 못 했어요.”
 
천백수만백복시상(千白壽萬百福詩想), 그 많은 시의 근원이 궁금했습니다. 
“사람인(人), 어질인(仁), 참을인(忍), 끌인(引), 인할인(因), 알인(認), 도장인(印), 인간이 살아가는 기본과 그리고 고향이지 뭐 있나요.”
수천(千)의 시 구절마다 청양에 대한 그리움, 아름다운 고향 땅이 있습니다. 16살에 떠나온 미량리 은항골은 90이 훨씬 넘은 지금도 늘 그립습니다. 농사를 지으신 아버지와 그냥 그런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영등포공고시절, 임조순 국어선생이 나를 지적하며 책을 읽어보라는 거예요. 또박또박 청산유수같이 읽어대니 “너 국어 시간은 꼭 나와라.” 그때 국어선생한테 인증을 받은 거지(웃음). 문학에 대한 것은 타고난 것 같아요. 지금도 끄적거리면 시가 나와요.” 천부적 소질이라는 말씀입니다. 본인의 글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그 어느 날처럼’입니다. 즉석에서 쓱쓱쓱쓱, ‘기사생94로다’ 시 한 편이 탄생했습니다. 

“내 인생의 시발은 서정석씨가 해 준 거죠. 그 양반이 내 은인이지요. 서정석 형님, 안준 편집국장, 김규현 교장, 광운대 전무이사 등 좋은 인연이 많았어요.”
물 길어다 주고 밥 얻어먹던 시절, 고마운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신문 배달을 하면서 학교도 공짜로 다녔습니다. 그 고마움을 고향 후배들에게, 문학인들에게 환원합니다. 운곡‧광암‧후덕초등학교에 장학상을 만들었고, 충청‧일붕‧은항 문학상도 만들었습니다. 
“내 할 일은 다 했슈. 하고 싶은 것 다 해서 미련도 없고.” 스스로 졸업장을 한 장도 안 버리고 가지고 있는 특이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 어느 날처럼
‘그대의 찬란한 빛이 영원하기를 빕니다 머리를 돌이킨 어느 날 얼굴을 맞대던 지난날 무지개 탄 꿈길에 서로가 사랑을 했더랍니다 먼 산을 타고 긴 레일에 앉아서 달빛이 가리운 버들가지에서 강물 흐르는 철교 위에서 달콤한 글귀보다는 뜨거운 웃음들이 가까이 절망을 몰아내고 멀리 슬픔을 뺏길지니 몸부림이 없었으면 애증의 괴로움에서 그대의 숨소리가 가까이 내 아픔에서 온갖 정성으로 가슴에 불을 놓고 언제나 언제까지나 그 어느 날처럼’-이우재, ‘그 어느 날처럼 지난날처럼’ 전문 
  
서라벌학교에 근무할 때 한문시조강습소를 열었고, 밥만 먹으면 사진을 찍으러 다녔습니다. “수수만 장을 찍었지요. 한 번은 명동에서 사진 전시회를 하여 3500만원이 들어왔는데 친구란 놈이 그 돈을 톡 빼가지고 도망갔어(웃음).”
-우주여행을 못 한 것이 유일한 아쉬움이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그런 때도 있었지(웃음). 우리나라는 다 좋잖아요, 인도는 신발 안 신고 다니는 것이 매력이구. 걔덜 보면 진짜 자유로워. 일본 홋카이도도 아주 좋아. 춥지만 기후도 좋고, 맥주도 많고.” 맥주, 좋아하시느냐 여쭙니다. 
“맥주 좋지요! 맥주밖에 안 마셔요. 크라운맥주를 많이 마셨어. 영등포고 재직 시절에는 맥주를 얼마나 마셨는지, 영등포역에서 잠들기도 하고(웃음).” 
한때는 맥주왕이었지만, 그 좋은 맥주를 3년 전에 끊었습니다. 

-술도 좋아하시지, 글이면 글 사진이면 사진, 혹시 못 하시는 것도 있으신가요? 
“저 냥반 운전은 못 해요. 컴퓨터도 못 하고, 한문만 잘 알어. 한문 하나 가지고 여지껏 살았유. 저 냥반은 처복을 많이 타고 났데요. 옛날에 사주 잘 보는 사람이 우리 집에 와서는, 선생님은 가만히 앉았어도 사모님이 훤히 비춰준다고 했어요. 고생은 내가 다 했지, 이 냥반은 참 멋지게 사셨슈. 집에 붙어 있지도 않았어. 맨날 여행만 다니구.” 공주가 고향인 박정례님은 20살에 외삼촌이 소개한 4살 연상의 청년 이우재와 혼인하였습니다. 
-복 중의 복 처복과 천부적 재능이 빛을 발하신 거네요?
“처복은 무슨(웃음)~”  

늘 사랑하고 운동하고 참일하고 참글 쓰는 것을 가훈으로 삼고 행했습니다. 그중에도 인(忍)자 사랑이 지극합니다. 인(忍)자를 96개의 모양으로 쓰고(그리며), 병풍과 액자를 만들었습니다. 고향 백월산에 비석까지 세웠습니다.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도 ‘백인지교대성공 천신만고인내심(百忍之教大成功 千辛萬苦忍耐心)’입니다. 
“한 번 참고 두 번 참고 세 번 참고 100번을 참으면 모든 것이 성공합니다.” 

하는 일마다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 될 일만 했기 때문에 모든 시발 시초가 참을인(忍)이 되었습니다. 인자(忍字)사상 연구회 총재입니다. 학생들에게 강의할 때도 맨 먼저 참을인자를 가르칩니다.  
“인(忍)자는 마음의 고향, 밝은 거울, 어쨌든 참고 견디지 못하면 아무것도 안 되지요.” 
분홍남방에 화려한 넥타이를 매셨습니다. 본인밖에는 만들지 못한다는 인(忍)자 표구액자 앞에서 나지막이 흥얼거립니다. “한 번 참고 두 번 참고 세 번 참고~” 시조창 같은 노래가 되었습니다. 

‘기사생 94로다 세월 잡고 늘어질까/정든다 천수 만복 해바라기 꽃꽃 향기/충혼탑 빛난 무궁화 칠갑산정 깔깔깔//장곡사 고운정도 장장 역사 천삼백년/오가며 보살핌도 세월 잡아 꼭꼭 묶어/칠갑산 청청 소나무 일편단심 왕왕왕’-5분도 안 걸린 즉석 시, ‘기사생94로다’ 전문
<김현락 편집주간>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