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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고 싶은 청양인 - 위석(位石) 윤영학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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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고 싶은 청양인 - 위석(位石) 윤영학 변호사
  • 청양신문 기자
  • 승인 2023.07.03 10:25
  • 호수 15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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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어렸을 때부터 성격은 판사가 맞습니다

“불행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젊어 열성적으로 일할 때가 제일 행복했겠죠. 수분지족(守分知足), 행복이란 것이 자기만족 아니겠습니까? 과욕부리지 않고요.” 1930년생, 키 182㎝, 이어령이 쓴 책을 즐겨 읽고 아흔 살까지 골프를 했으며 ‘핸디18’의 신사 법조인 윤영학님은 조직의 문화였던 폭탄주를 전혀 안 마십니다. “폭탄주 하던 친구 오래 못 살았어(웃음).”

-키가 엄청 크시네요?
“어렸을 때 제대로 먹은 것도 없는데 키는 큽니다(웃음).”
-인공지능(AI)이 판사직도 가능할까요?
“글쎄요. 실무를 떠난 지 한참 돼서, 하긴 판례도 인공지능이 검색한다하는데 나는 안 해봐서 모르겠네요. 그것이 사례가 되어 나쁜 방향으로 돌면 걱정스러울 생각이 드네요. 법만큼은 인공지능이 아니었으면 싶어요. 실제 똑같은 현상이 있을 수 없잖아요? 그런데 일률적으로 처리한다는 것은 조금 아쉬움이 따를 겁니다.”
  
검찰 20년의 별별 사건
“대검찰청 특별수사과장으로 있을 때였어요. 1974년 10대 뉴스에도 선정된 건으로, 최대 경제 사기 사건이 있었지요. 박영복이라는 사람이 대구 교외에 있는 시골 돌산 수만 평을 서류 위조해 담보로 제공, 중소기업은행에서 7억 원의 부정 대출을 받았어요. 중소기업은행장이 구속되는, 당시 큰 사건이었죠. 이후 박영복은 8개 은행에서 약 70여억 원 부정 대출을 받은 것도 파악돼, 서울은행장은 사표를 내고 많은 직원이 감봉을 받았지요.”

“동정해야 하는 사건도 많아요. 전라도 광주의 한 병원 아들이 있었는데, 경력을 위조해 병역법 위반이 됐어요. 그 당시는 병역법이 엄했는데, 그 친구는 싹수가 있었지요. 안됐다 싶어 윗 양반들과 상의하여 기소유예 처분을 했죠. 후에 그 친구가 공부도 잘하고 독일 유학을 다녀와 유명해져서 찾아왔는데 모르겠더라구, 조금 얘기를 들어보니 기억이 나서 ‘그때 용서해 준 것이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 친구가 많이 고마웠던 모양더라구요.” 

“제일 나쁜 사기는 불쌍하고 어려운 사람 등쳐 먹는 것이죠. 서울지검에 근무할 때, 청와대 경호실 직원 하나가 취직시켜준다며 돈을 받아 고소당한 사건이 있었어요. 피해자를 보니 의복도 남루하지만, 얘기를 들어보니 참 불쌍한 사람이더라구요. 피해금 변제를 종용해도 이놈이 안 하거든, 그래서 하루는 그놈을 구속하려고 영장 신청을 했더니, 정보부장이 검사장한테 연락을 한 모양이더라구. 검사장이 결재를 안 하여 불구속수사를 하는 중에 자살해 버렸네요. 변제 능력도 없는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구속했으면 최소한 자살은 안 했을텐데…, 후회 많이 했죠. 어려운 사람, 약한 사람을 등쳐 먹는 것이 아주 질 나쁜 거죠.”
  
-법은 공정하다고 생각하시나요?
“법은 공정하죠. 다만 집행하는 사람이 문제죠. 요즘 판결을 보면 상식에 맞지 않는 것도 있습디다. 법은 일반 도덕 기준보다 강하다 할까, 공동생활을 해야 하니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규칙은 있어야 하지요.”
“법은 시대의 흐름에 따르지 못해요. 오히려 시대의 흐름을 법이 뒤쫓아갑니다. 시대에 맞게 하려고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려는 것이죠.” 

일(노동) 아버지, 이상(꿈) 어머니
“본래 저희 아버지는 청남면 지곡리 출신인데,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여의고 아버지 외가인 운곡면 위라리에 와 기반을 잡았어요.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어 고생 많이 하셨죠.”
“아버지는 일로 자수성가하셨어요. 검소‧근면은 아버지한테 배웠고, 어머니는 교육열이 높으셨지요. 언문을 배워 이야기책을 읽고는 마을 사람들에게 들려주기도 했어요. 어머니 덕으로 7살에 국어는 깨우쳤지만, 아버지 일을 돕느라 명씨 종중에서 운영하던 가내학교를 1년 다니다 운곡국민학교 3학년으로 편입했는데도 다른 친구들보다 3년이나 늦게 갔지요.”

“아버지는 오로지 일해서 땅 사는 것이 최대 목표였죠. 농번기 때면, 아주 바쁜 날은 학교도 못 가고 일을 했어요. 밖으로 슬슬 나오면 어머니는 책을 담 너머로 던져 줬어요. 얼른 학교 가라고요. ‘몸은 개천에 있어도 입은 관청에 가 있다’는 속담처럼, 어머니는 이상이 아주 높으셨어요. 저는 어머니 성격을 많이 닮은 것 같고, 어머니는 젊은 나이(54세)에 돌아가셨지요.” 

-운곡초와 청양중을 거쳐 체신고에 입학하셨습니다.
“그때는 꿈이란 것이 있기나 했나요? 큰 뭣을 하려고 했던 것도 없지. 당시 체신학교가 장학금이 젤 많았어요. 교과서와 교복은 무료고, 장학금 4천 환을 받아 기숙사비 2천 환만 내면 돈 쓸데가 없어요. 시골 어려운 집 애들만 모였으니, 어떤 친구는 용돈 안 쓰고 장학금을 모아 집으로 보내기도 했지요. 체신고 2학년 올라가며 6‧25가 나 청양으로 내려갔다가 수복 후 예산농고로 편입했죠. 당시 전쟁통이라 대학생은 병역 연기가 되는 바람에 시골 학생들도 대학에 많이 갔지요. 기왕에 대학엘 가려면 법쪽으로 가면 어떨까 했지요.”

“법대 4학년 때 한 학기 휴학하고 청양에 가 있는데, 예농 동창인 친구가 고등고시에 내 원서를 내놓고 시험 보러 올라오라고 해서 시험을 봤지요. 당시는 사법과‧행정과‧기술과 3개 과로, 오히려 행정과를 잘 봤는데 1과목 과락으로 떨어지고, 사법과는 시험은 못 봤어도 과락이 없어 합격하게 됐지요(웃음).” 
1957년 8회 고등고시(사법과)에 청양군 내 최초로 단 한 번에 합격했습니다. 

“결혼을 일찍 했는데, 중학교 3학년 19살에 했지요. 어머니가 젊어서부터 병약해서 항상 병석에 누워 있었어요. 내가 장남이다 보니 시골서는 사실 며느리를 얻는 것보다 일꾼을 얻는다는 생각을 하죠.” 

법조인으로서의 일
“최대규라는 강직한 선배가 있었는데, 절대 시골 유지들이랑 어울리지 말라고 했어요. 당시 사냥을 많이 할 땐데, 어울려 놀면 업무 집행하는데 공정에 휘말린다고요. 원래 성격도 사교적이 못 되지만, 선배의 말을 잘 듣다 보니(웃음) 더 사교성이 떨어졌지요.”
-판사직이 더 어울리실 것 같아요. 
“검사는 능동적이고 활동적이죠. 판사는 주어진 사건 판단만 하는 것이고. 4‧19 이후 군법무관 제대하고 법원과 검찰 양쪽에 이력서를 냈는데, 법원에 사정이 생겨 인사가 늦어지고 검찰 인사가 빨랐던 바람에…. 중간에 판사로 바꾸려 했었는데 지방 판사자리라서 안 갔죠. 사실 내 성격에는 판사가 맞아요(웃음).”

“법공부를 안 했으면 어쩌면 교육계에서 일했을 거예요. 중학교 다닐 때, 영어를 가르친 김현극선생님이 계셨는데, 해방 후 만주서 활동하셨어요. 촌학생이 볼 때 잰틀하고, 상당히 멋져 보이더라구요. 그 선생님 기억이 나요. 영어선생이라기보다 교육계가 괜찮지 않을까…?”
“친구들이 이젠 별로 없어요. 예전에는 고향 위라리만 해도 7~8명 되었는데, 중학교 친구로는 청양에 유성현친구 하나 있어요. 걸음을 못 걸어서 그저 성묘나 가끔 가죠.”   

-특별히 관리하는 장수비결은요?
“규칙적인 생활인 것 같아요. 4시 반에 일어나서 맨손체조, 5시 반에 헬스장에서 스파나 슬슬 러닝머신을 하고, 아침은 7시 점심은 12시 저녁은 6시에 먹는, 거의 시간을 지킵니다. 음식은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먹고, 요즘은 다리가 불편해 운동도 못하고 시력이 떨어져 독서도 못 합니다. 남는 시간은 텔레비전으로 스포츠경기를 봅니다. 며칠 전에 코리아나 유상옥회장과 점심 먹고, 가끔 나가 밥 먹으며 시간을 보내죠.” 

좋은 세상의 조건
“물질적으로 발전하니 좋은 세상이긴 하지만, 우리 생각하고는 많이 다르죠. 옛날에는 장유유서니 뭐니 했는데, 지금은 그런 것이 전혀 없잖아요. 사회질서가 잘 잡히고, (긴 침묵) 상식적인 세상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죠. 사회질서가 문란한 것은 상식이 아닌 그런 것에서 연연한 것은 아닌가? 예전에는 생각지도 못한 살인사건 등, 각박하고 개인적이라 할까? 요즘은 자녀도 하나 아니면 안 낳잖아요? 자기 기준으로만 생각하게 되고 사회에 협동한다거나 남을 배려하는 일이 점점 사라지고 있죠.” 

“남에게 적덕은 못 해도 폐는 끼치고 살지 말자는 생각이죠. 최소한 그렇게는 살아야지 않겠나 하며, 어른 노릇을 하려면 젊은 사람들한테서 존경을 받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우선 자기 생활이 곧(正)아야죠.” 
“후회하는 것이 있죠.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뒤돌아보면 후회스러운 것이 왜 없겠어요? 다시 이런 삶이 주어져도 특별히 달라질 건 없겠지만 자기중심적이더라도 사회적으로 기여하는, 그런 생활을 많이 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요. 고향에도 크게 기여한 것이 없어서, 그런 점에서 늘 아쉬움이 있죠.” 
“검사로서 법조인으로서의 일, 그 방면에서는 나름대로 공정하고 정의롭게 약자를 위한다고 했지만, 그걸로 만족하느냐 하면 그것도 어렵거든요.”
 
-고향 후배들에게 한 말씀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자기 분수를 알고 분수에 맞게 목표를 세우라고 하고 싶어요. 목표를 너무 높게 세워 좌절하지 말고 인내심을 갖고 끈기 있게 노력해라! 과욕 부리면 탈 나죠. 자기 분수껏 목표를 세웠으면 좋겠지요.”

-검사 생활을 오래 하면 눈빛이 달라진다고 말 한 검사가 있었습니다. 나쁜놈들한테 눌리지 않으려니 걔들을 닮아가기 때문이라면서요. 혹시 변호사님도 그러셨나요?
“(웃음)성격이 많이 바뀌긴 합디다. 어렸을 때 성격으로는 사실 검사할 성격은 아닙니다. 눈빛 달라지는 것은 제3자의 평가죠.” 
    <김현락 편집주간>

※ 빨간색 나이키운동화를 신은 동생 윤인학님도 키가 큽니다. “형님은 정직하고, 욕심이 없습니다. 어린 시절에 고생 많으셨지요. 자리개질(곡식단을 묶어서 타작하는 것)까지 했습니다.” 인터뷰 내내 함께 계셨습니다. 마치, 아버지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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