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엮거리 한 두름 바다의 맛 – 조기 찾아 삼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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엮거리 한 두름 바다의 맛 – 조기 찾아 삼만리
  • 청양신문 기자
  • 승인 2023.05.28 12:39
  • 호수 149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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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부터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이 좋아했던 물고기, 오래도록 공력을 들여야 하는 밥도둑, 한국인의 입맛을 잡는 저장식품, 격이 높은 선물, 어르신들이 첫손을 꼽는 생선, ‘조기’와 ‘굴비’입니다. 

조기는 민어과에 속하는 바닷물고기의 총칭으로 참조기‧보구치‧수조기‧흑조기‧부세 등입니다. 사람의 기를 돋운다 하여 조기(助氣), 머리에 돌이 있어 석수어(石首魚)라 하였습니다. 정약전의 『자산어보』에는 때를 따라 물을 찾아옴으로 추수어(蝤水魚)라 하였습니다. 조기를 짚으로 엮어 말리면 조기 허리가 굽어지니 구비(仇非, 굽이굽이), 구비가 변해서 굴비가 되었다고도 하며 전라남도에서는 엮어 말린다고 ‘엮거리’라고도 합니다. 

1930년대의 음력 4월, 불과 1천 명이 거주하던 연평도에 선원과 상인 등 2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모입니다. 조기 파시로 엄청나게 많은 어선이 모였기 때문이지요. 연평도 주민들은 조기잡이 어선에 물을 공급하며 돈을 법니다. 그렇게 성황이었던 파시는 1968년 5월을 마지막으로 더는 열리지 않았습니다. 영광의 법성포 칠산바다에서도 봄과 여름이 교차할 때 여러 어선이 모여 그물로 조기를 잡았습니다. 바다에 조기 시장이 형성되면 강아지도 입에 돈을 물고 다녔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로 나라 안의 생선 상인이 다 모였습니다.

50여 년 전 만 해도 서해로 올라오는 조기떼를 따라 수많은 어선과 상선이 줄을 지었지만, 이제 조기는 서해로 올라오지 않습니다. 맛과 모양새가 비슷한 물고기를 찾아 아프리카로 가지요. 

조기는 한겨울 제주도 서남방에서 월동한 후 북상하여 봄이면 전라도 칠산탄(법성포 앞바다)에 이르고 초여름이면 연평도 근해에서 압록강으로, 여름이면 발해만의 얕은 바다에서 산란합니다. 무리로 이동할 때는 개구리가 떼 지어 우는 듯한 소리를 내며, 물 위로 튀어 오르는 습성이 있습니다. 함경도의 명태처럼 전라도에서도 많이 잡혀 ‘전라도 명태’가 된 조기는 소금에 절이고 담가 건어와 젓갈이 돼 전국으로 퍼져나갔으며, 모든 사람이 귀한 생선으로 여겼습니다. 맛이 좋고 흔해서 더 소중했으며,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어 제사상에 오르는 제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옛사람들은 봄에 잡은 조기를 오래 보관하기 위해 바짝 말렸습니다. 소금을 듬뿍 뿌려 사나흘 절인 후, 그늘에서 돌로 눌러놓았다가 물이 빠지면 엮어 말립니다. 이슬을 피해 보름 넘게 말리면 살이 딱딱하게 굳습니다. 꼬리 쪽을 잡고 찢을 때 북어포처럼 일어나야 ‘굴비’라고 하였으며, 쪽쪽 찢어먹었지요. 
굴비는 소금간과 민물 세척, 건조하는 시간에 따라 맛이 다릅니다. 산란 직전 곡우 때 잡은 조기(곡우살조기‧오사리조기)를 가장 좋은 일품(逸品)으로 치고, 이것으로 만들어진 ‘곡우살굴비‧오가재비굴비’를 특품으로 취급합니다. 

‘굴비’라는 명칭은 고려 인종 때 이자겸에 의해 지어졌습니다. 왕비인 딸에게 왕의 독살을 시도하고 왕위를 뺏으려 한 죄목으로 이자겸은 법성포에서 귀양을 살게 됩니다. 그때 소금에 절여 말린 참조기의 맛에 반해 말린조기와 자신의 마음 상태를 적어 인종에게 올립니다. 선물은 보내지만, 결코 비굴하게 살지 않겠다는 뜻의 비굴(非屈) 글자를 ‘굴비’로 바꿔 썼지요. 그때부터 굴비는 임금님의 수라상에 올랐고 명물이 되었습니다. 
 

살만 말리는 여러 생선과 달리, 조기는 조름(아가미 안의 기관으로 모양이 빗살 같고 빛이 검붉으며 반원 꼴로 생김)만 떼어내고 내장째 절이고 말립니다. 굴비의 고리타분하고 묘한 쩐내는 내장에서 나오는 냄새지요. 
해풍에 잘 말린 굴비를 통보리가 담긴 항아리 속에 넣어 보관한 것인 ‘보리굴비’는 보리의 쌀겨 성분이 굴비를 숙성시켜 더 좋은 맛을 냅니다. 색 또한 몸속 기름이 거죽으로 배어 나와 누런색을 띱니다. 오래 두어도 상하지 않아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 탄생하였습니다. 보리와 굴비가 함께 곰삭으며, 상하지 않는 자연의 원리를 이용하였습니다. 

보리굴비는 쌀뜨물에 1시간 정도 담갔다 꺼내 찜통에 찐 후 다시 살짝 굽습니다. 쫀득하면서도 짭조름하고 바삭한 맛과 향과 식감은 입맛을 당깁니다. 뜨거운 기운과 특유의 향기를 가진 보리굴비는, 녹찻물과 만나면 환상의 조합(?)으로 입안이 개운해지며 품격을 더해줍니다. 녹차의 탄닌성분이 내장의 강한 냄새와 비린내, 짠맛을 누그러뜨리고 기름기를 씻겨줍니다. 연둣빛 물이 보리굴비의 맛을 더 깊이 느낄 수 있게 하지요. 고추장에 먹기 좋게 굴비의 살만 발라 버무리는 ‘고추장굴비’도 있습니다. 

조기에 소금으로 간을 하고 꾸덕꾸덕할 정도로 말린 ‘간조기’, 요즘의 굴비입니다. 옛날의 바짝 말린 굴비가 점차 사라지면서 굴비의 참맛도 사라진다고 어르신들은 말합니다. 굴비는 계절을 가리지 않지만, 특히 여름에 먹어야 맛이 좋다고 하였습니다. 입맛이 떨어졌을 때, 찬물에 만 밥 위에, 잘게 찢은 굴비를 참기름 두른 고추장에 찍어 얹어 먹는 것이지요.  

죽죽 매달은 엮거리를 봅니다. 검푸른 바다를 담은 동그란 눈동자도 말랐습니다. 넓은 바다에서 자유롭게 살다 그물에 잡혀 온 고통과 회한도 없습니다. 다만 짭짤하고 담백한, 꼬들꼬들하고 단단한 살집을 만든 자신의 생이 어느 누군가에게는 행복한 음식이 될 수 있으리라는 들뜸만 있을뿐이지요. 
<김현락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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