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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다녀가시기 바랍니다 – 불명산 화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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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다녀가시기 바랍니다 – 불명산 화암사
  • 청양신문 기자
  • 승인 2023.05.22 13:25
  • 호수 149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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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은 고산현(高山縣) 북쪽 불명산(佛明山) 속에 있다. 골짜기가 그윽하고 깊숙하며 봉우리들은 비스듬히 잇닿아 있으니, 사방을 둘러보아도 길이 없어 사람은 물론 소나 말의 발길도 끊어진 지 오래다. 비록 나무하는 아이, 사냥하는 사나이라 할지라도 이르기 어렵다. 골짜기 어귀에 바위벼랑이 있는데, 높이가 수십 길에 이른다. 골골이 계곡물이 흘러내려 여기에 이르면 폭포를 이룬다. 그 바위벼랑의 허리를 감고 가느다란 길이 나 있으니 폭은 겨우 한 자 남짓이다. 이 벼랑을 부여잡고 올라야 비로소 절에 닿는다. (절이 들어선) 골짜기는 넉넉하여 만 마리 말을 감출 만하며, 바위는 기이하고 나무는 해묵어 늠름하다. 고요하되 깊은 성처럼 잠겨 있으니 참으로 하늘이 만들고 땅이 감추어둔 복된 곳이다.’- 「화암사중창기(花巖寺重創記)」 부분 

꽃 피운 산딸나무가 산길 초입에서 맞이하는 것 말고는, 지난번이나 지지난번에 왔을 때처럼 그 모습 그대로라서 참 좋습니다. 불명산 시루봉 남쪽 깊은 계곡, 연두 속의 오솔길을 걷습니다. 심심할 듯 하나 심심하지 않습니다. 두런두런 새소리, 또랑또랑 물소리가 버드나무와 편백나무 사이로 들쑥날쑥합니다. 때죽나무 통꽃이 계곡 검은 바위에 뚝뚝 떨어져 있거나 물 위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점점 커지는 물소리를 들으며 몇 차례 꺾어진 철제 계단을 오르면 하늘과 맞닿은, 꽃으로 둘러싸인 절집이 있습니다. 일주문도 천왕문도 금강문도 해탈문도 없습니다. 연두와 초록, 둥글거나 길쭉하거나 크거나 작거나, 나뭇잎의 새로운 푸른 빛만 있을 뿐입니다. 
  

붉은 목단꽃은 지고 나무쑥갓(마거리트) 꽃이 화단을 하얗게 채웠습니다. ‘寺巖花山明佛(불명산화암사)’, 아래층 앞줄에는 기둥을 나란히 세우고 뒤쪽으로 돌축대를 쌓은 2층짜리 견고한 성(城) 같은 누각의 편액입니다. 1611년에 세워졌으며 그 후에 여러 번 수리됐다는 ‘우화루’입니다. 문간채와 우화루 사이, 몇 개의 돌층계를 오르니 아래로 부드럽게 휜 나무를 댄 문턱과 위로도 자연스레 휘어진 문미(문 위에 가로 댄 나무)의 대문이 있습니다. 적당히 휘어진 나무가 가장 잘 어울리는 자리에 있어, 본래 대문은 그래야 한다는 듯 오붓합니다. 절집 아닌 듯한 절집의 문지방을 넘습니다. 중앙에 걸린 연꽃등 밑으로 절마당에 들어섭니다. 
 
꽃비 흩날리는 누각 우화루(雨花樓), 절마당에서의 우화루는 단층 건물로 마당을 연장시킨 것처럼 보이는 마루입니다. 마룻장이 낡아 출입을 금하고 있습니다. 세 개의 열린 창문은 푸른액자 같습니다. 텅 빈 대청마루 입구의 커다란 나무물고기, 안쪽 기둥에 걸린 커다란 목탁, 묵직하고 지긋한 울림이 들리는 듯합니다. 돌축대 위의 우화루는 극락전과 마주하며 절마당도 되어줍니다. 절집의 정문이며, 일주문이고 천왕문입니다. 
  
죽은 이를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극락전, 1297~1307년(고려 충렬왕) 사이에 지어졌으나, 정유재란으로 불에 타 1605년(조선 선조)에 다시 지은 후 예닐곱 번의 보수공사를 하였습니다. 옛 모습을 살려 잡석을 쌓고 자연석 그대로의 주춧돌에 민흘림기둥을 세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하앙식(下昻式, 지붕의 무게를 분산시키고자 바깥에서 처마 받치는 부재를 하나 더 설치해, 처마를 길게 빼는 것으로 강우량이 많은 지역에서 쓰인 백제의 건축방식) 구조입니다. 앞면의 공포(栱包)는 임진왜란 이후의 양식인 용머리 모양으로 장식했으며, 뒷면은 긴 삼각 모양의 공포로 임진왜란 이전의 양식이 사용됐습니다. 

하앙식구조

극락전의 아미타부처님 위로, 다포식공포가 세 겹 처마를 받치고 있는 날렵하고 화려한 닫집이 있습니다. 여의주를 문 비룡이 꿈틀거리고, 비천상(하늘에 사는 선녀)의 옷자락이 날아오릅니다. 사각의 반자로 짜 맞춘 천장과 대들보의 빛바랜 단청, 3백 년이 넘는 동안 강하고 짙었던 색들이 세월처럼 날아간 듯 은은합니다. 밤이면 저절로 울려 스님과 신도를 깨웠다는 동종도 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불에 타 광해군 때 다시 만들었습니다. 스스로 울어 위급함을 알리기도 하여 자명종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極‧樂‧殿’, 한 글자씩 작은 판자에 써서 나누어 붙였습니다. 

극락전 왼쪽으로 출입을 금하는 대나무가 입구를 탁 막았습니다. 입을 놀리는 것을 삼가라는 철영재(啜英齋), 사육신 성삼문의 조부 사당입니다. 오밀조밀 절집의 대부분이 낯설지 않고 구여우니 사당도 부도탑도 키 낮은 굴뚝도 예뻐보입니다. 
승방인 적묵당 마루에 앉아 네 귀퉁이의 처마에 갇힌 하늘과 연등과 마당을 봅니다. 품 안에 폭 들어올 것 같은 뜨락, 우화루-적묵당-극락전-불명당에 둘러싸인 절마당과 하늘천장입니다. 작아도 갑갑하지 않은,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으며 아늑하고 잔잔하고, 그냥 담백합니다. 

전라북도 완주군 경천면 가천리를 지나 외길이 끝나는 숲속에 가려진 곳, 푸른어둠과 푸른물소리로 가득 찬 불명산 계곡이 있습니다. 돌축대와 돌담 너머로 그늘지듯 깊게 잠긴 가람이 있습니다. 안도현시인은 ‘작지만 소중한 책 같은 절/혼자서 가끔씩 펼쳐보고 싶은/화암사 내 사랑/찾아가는 길을 굳이 알려주지는 않으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언제까지나 예전의 그 모습 그대로이기를 바라는 마음이었겠지요.     <김현락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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