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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있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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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있는 사람들
  • 청양신문 기자
  • 승인 2023.05.08 11:29
  • 호수 149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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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남(대치면 상갑리 출신ㆍ경기도 오마중 교감)
유철남 씨

‘멋’이라는 게 보는 사람의 입장에 따를 것이지만 내가 보는 ‘멋’은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되 약간의 여유를 갖춘 것이라고 생각한다. 
농사일은 예나 지금이나 고되다. 그럼에도 마을에는 멋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는 게 힘든데 여유까지 갖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겠지만 그 와중에도 여유와 멋을 잃지 않는 여유는 더 큰 감동을 주었다. 

양지터의 나보다 네댓 살 더 먹은 형은 운동을 잘하였다, 특히 씨름을 잘하였다. 체격은 크지 않았으나 동작이 빨라 아무리 큰 상대라도 이겨냈다. 샅바를 잡은 손을 놓고 순식간에 배 밑으로 들어가 오른손으로 왼 다리를 치면서 뒤집는 솜씨는 일품이었다. 그 덕분에 읍내에 있는 중학교에서도 학교를 대표하는 선수였다.

경사가 있거나 설, 추석 등의 명절에는 마을에서는 풍장을 치는 풍습이 있었다. 추수를 앞둔 추석 무렵이면 풍물이 울렸다. 맨 앞에는 꽹과리가 서고 다음은 장고, 법고, 북, 그리고 마지막에는 징이 따라왔다. 멀리 노란 벼가 일렁이는 논에 긴 창대미가 보이고 거기에 길게 쓴 ‘농자천하지대본야’라는 글이 보이면 사람들은 풍장을 치나 보라고 하면서 하던 일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며 행렬을 기다렸다. 맨 앞에 선 사람은 나에게는 집안 형님뻘인 분이셨다. 스물이 갓 넘은 서글서글한 청년. 약간 곱슬머리가 부풀어 올라 키가 껑충 커 보이는 분이 웃을 듯 말 듯 한 표정으로 그 큰 손바닥에 꽹과리 줄을 두어 번 동여 감고 동그란 참나무로 깎은 채를 덩실거리는 어깨춤과 함께 두들겨대면 보는 것만으로도 다리가 들썩거리고 어깨가 움찔거렸다. 구경하는 사람 중에 처녀애들이 있으면 다가가서 귀에다 ‘땅 따르라르랑 땅 따르라르랑’하고 울려대면 그들은 깜짝 놀라며 얼굴이 빨개져서 귀를 막고 내빼었고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배를 잡고 웃어댔다. 

풍물의 요란한 소리가 길을 지나가면 마을 아이들은 뒤를 따라가면서 구경을 하고 웃고 뛰면서 춤을 추었다. 넓은 집 마당에서는 원을 돌면서 한바탕 신명 나는 장단을 연주하고 집주인이 내어주는 막걸리와 김치, 떡을 먹으면서 잠시 숨을 고르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일어나서 길을 나서면 꽹과리가 다시 앞장을 서서 ‘따랑 따랑’ 하면서 나를 따라오라는 듯 길을 나섰다. 행렬은 저녁때까지 이어졌다.

사방에 문이 넷이나 달린 사랑방에 산들산들 바람이 불어왔다. 할아버지는 낮에 괭이로 고추밭을 매시던 차림을 벗어던지시고 풀까지 곱게 먹인 하얀 모시 적삼을 입으셨다. 그리고는 방안에 앉아서 오래된 퉁소를 꺼내 부셨다. 들어도 알 수 없는 노래였으나 마당 가 감나무 잎으로 스쳐오는 바람 소리처럼 시원하기도 하고 떨리는 듯이 애절하기도 하고 뒷산 샘에서 솟는 물처럼 상쾌하기도 하였다. 

바람결에 섞어 나오는 그 소리는 높은음과 낮은음을 헤쳐 나가면서 끊어질 듯 이어가며 멈추지 않고 빠져나가고 있었다. 한참을 부시다가 이번에는 밖으로 나오셔서 목청을 가다듬어 먼 구름을 보시며 시조창을 하셨다. 낮다가 높아지는 소리가 끊어질 듯 이어졌다. 
시조 소리는 바람 따라 방안을 맴돌다가 뒷산 솔밭으로 흘러갔다. “청산리 벽계수야 ~” 이 몇 글자 안 되는 대목이 아주 긴 호흡으로 이어졌다. 듣기에도 숨이 답답하고 막혔으나 당기고 밀어내며 멈추었다가 이어지는 소리는 느릿한 구름처럼 유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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