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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옷·죽창·감발·모의탑이 꾼 꿈 – 동학농민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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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옷·죽창·감발·모의탑이 꾼 꿈 – 동학농민혁명
  • 청양신문 기자
  • 승인 2023.05.08 11:21
  • 호수 149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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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 세상 둘러보기

‘눈 내리는 만경들 건너가네/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가네/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거나/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우리 봉준이/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그 누가 알기나 하리/처음에는 우리 모두 이름 없는 들꽃이었더니/들꽃 중에서도 저 하늘 보기 두려워/그늘 깊은 땅속으로 젖은 발 내리고 싶어하던/잔뿌리였더니//그대 떠나기 전에 우리는/목쉰 그대의 칼집도 찾아주지 못하고/조선 호랑이처럼 모여 울어주지도 못하였네/그보다도 더운 국밥 한 그릇 말아주지 못하였네/(중략)/봉준이 이 사람아/그대 갈 때 누군가 찍은 한 장 사진 속에서/기억하라고 타는 눈빛으로 건네던 말/오늘 나는 알겠네//들꽃들아/그날이 오면 닭 울 때/흰 무명띠 머리에 두르고 동진강 어귀에 모여/척왜척화 척왜척화 물결 소리에/귀를 기울이라’ –안도현 시 ‘서울로 가는 전봉준’ 부분

“나를 죽일진대 종로 네거리에서 나의 목을 베여 오고 가는 사람들에게 내 피를 뿌려주는 것이 옳거늘, 어찌하여 컴컴한 적굴에서 암연히 죽이느냐”, 녹두장군 전봉준은 형형한 눈빛으로, 타는 눈빛으로 교수대 앞에서 법관을 꾸짖습니다. 지금의 단국대학교 야산에 버려진 것으로 알려진 전봉준의 시신은 끝내 찾지 못하였습니다.(정읍에 있는 동학지도자의 무덤 또한 시신이 없는 가묘랍니다.)
  

‘사발통문’, 호소문·격문 등을 쓸 때, 주모자를 알지 못하도록 서명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사발 모양으로 둥글게 삥 둘러 적은 통문. 1893년11월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에서 작성된 동학농민군 지도부가 남긴 유일한 기록으로, 조병갑의 폭정을 징계하여 다스리고 전라감영을 점령하여 서울로 직격한다는 결의가 담겨있음.
‘사발통문’, 호소문·격문 등을 쓸 때, 주모자를 알지 못하도록 서명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사발 모양으로 둥글게 삥 둘러 적은 통문. 1893년11월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에서 작성된 동학농민군 지도부가 남긴 유일한 기록으로, 조병갑의 폭정을 징계하여 다스리고 전라감영을 점령하여 서울로 직격한다는 결의가 담겨있음.

19세기의 조선은 세도정치 아래 매관매직이 성행하며 지방관리의 부정부패와 수탈이 일반적인 현상이었습니다. 예로부터 전라도는 평야와 해안이 있어 생산물이 풍부하여, 다른 지역에 비해 관리들이 선호하는 곳이었으며 상대적으로 수탈의 대상지였습니다. 그중에도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은 수단을 가리지 않는 악랄한 탐관오리였습니다. 아버지의 공적비를 세운다는 명분으로, 고부 농민들에게 불효·불목(친족이 화목하지 않은)·음행·잡기 등 얼토당토않은 죄목을 붙여 벌금을 걷었습니다. 멀쩡한 만석보(萬石洑)를 허물고 새로운 보를 만들어 물값을 강제로, 엄청난 세금을 거둬들였습니다. 

한문선생이었던 35살의 전봉준(1855~1895)은 동학에 입교해 고부지방의 책임자인 접주로 임명됩니다. 조병갑의 학정이 심해지자, 고부 농민들은 전창혁을 대표로 탄원서를 작성해 제출합니다. 조병갑은 오히려 전창혁에게 곤장을 쳐서 장독으로 한 달 만에 죽게 합니다. 전창혁의 아들 전봉준은 아버지 죽음에 분노하며 조병갑을 쫓아내려 하였으나 실패합니다. 

1894년 3월, 전봉준은 동학 대접주 손화중을 만나 농민군 봉기를 계획하고 편성해 죽창 등의 무기와 군량미를 준비합니다. 나랏일을 돕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자 했습니다. ‘무장기포’, 무장현 들판에서 탐관오리의 숙청과 보국안민을 위해 일어서자는 내용의 창의문을 발표하고 동학을 중심으로 한 농민군이 전투를 선포합니다. 동학농민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며 동학교도, 농민, 양반 사대부와 지식인층, 불교 승려들이 가담합니다.

정읍시 덕천면 동학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 있는 ‘울림의 기둥’.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이 봉기했던 전국 90개 지역을 나타냄. 흰색의 기둥은 무명옷을 입은 농민군과 혁명의 순수성을 상징.
정읍시 덕천면 동학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 있는 ‘울림의 기둥’.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이 봉기했던 전국 90개 지역을 나타냄. 흰색의 기둥은 무명옷을 입은 농민군과 혁명의 순수성을 상징.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은 ‘무장’에서 ‘고부’를 치고 ‘백산’으로 본진을 옮깁니다. 멀리서 가까이서, 여기저기서 달려온 사람들로 백산은 말 그대로 인산(人山)을 이루었지요. 그들이 서면 온 산이 농민의 흰옷으로 덮이고, 앉으면 손에 든 죽창이 빼곡하다 해서 ‘서면 백산, 앉으면 죽산’이란 말이 생겨났습니다.(백산은 47미터 높이로 나지막해 산도 아닐 정도지만, 사방이 들판으로 둘러싸여 있어 이곳에 올라서 보면 수십 리 들판이 한눈에 들어와 관군이 어느 쪽에서 오더라도 금방 알아챌 수 있는 유리한 지형입니다.) 

정읍시 고부면 덕신강길에 있는 ‘동학혁명모의탑’
정읍시 고부면 덕신강길에 있는 ‘동학혁명모의탑’

황토현에서의 승리는 진주성을 함락시킵니다. 다음 날 서울에서 전주성을 탈환하러 내려온 정부군과 농민군은 두 차례 전투를 치르고 나서야 전봉준의 폐정개혁안을 받아들입니다. 농민군은 전주성을 내주고 해산하며, 전라관찰사 김학진과 전봉준의 합의로 전라도 내 53곳에 ‘집강소’가 설치됩니다. 집강소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관 합동 농민 자치 기구로 지방의 치안과 행정을 비롯하여 탐관오리 징벌, 동학농민군의 참정권 요구, 양반 토호들의 탐학 금지, 토지 분배, 노비 해방 등 실질적인 개혁을 집행합니다. 전봉준은 농민군에게 군율을 엄격히 지키도록 하였으며, 살인이나 약탈을 금지했고 충효를 다하여 외세를 몰아내고자 했습니다.     

청일전쟁과 갑오개혁을 거치며, 일본의 행태에 격분한 전봉준은 서울로 향합니다. 서울로 가는 교통의 중심지 삼례에 10만 명이 넘는 농민군이 모였습니다. 충청도에서 경상도에서 강원도에서 항일운동은 일어납니다. 동학농민군은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정부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지만,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 앞에서 끝내 나아가지 못하였습니다.     

고부민란을 시작으로 한때는 관군을 무찌르고 삼남 지방을 휩쓸었던 동학농민혁명은, 결국 청나라와 일본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말았으나 여기에 참여한 동학농민들은 후에 항일 의병 운동에 가담하게 되었고 3·1운동으로 계승되었습니다. 5월 11일은 황토현 일대에서 동학농민군과 전라감영군이 최초로 전투를 벌여 크게 승리했던 날로써, ‘동학농민혁명기념일’로 선정된 것이지요. 
<김현락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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