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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 현재를 배우는 축복의 시기 - 인당(仁堂) 윤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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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 현재를 배우는 축복의 시기 - 인당(仁堂) 윤종일
  • 청양신문 기자
  • 승인 2023.02.06 17:01
  • 호수 147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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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고 싶은 청양인

자신의 인생 그 자체를 아름답게 여기는, 누구와 비교하지 않고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최고의 승자, 인당장학재단 윤종일이사장의 아름다운 흔적을 따라갑니다. 

인당(仁堂), ‘마음이 너그럽고 슬기로운 덕이 모인 집’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슬기롭게, 남을 이롭게 하는 덕을 베푸는 인생을 살고자 호(號)를 인당으로 지었습니다. 더불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후배들에게 학문이나 연구를 지속할 수 있도록 장학재단을 설립하고 그 장학재단의 명칭도 인당장학재단이라 하였습니다. 이름이나 명예 대신 인당장학재단을 남기고자 합니다.

“더 바랄 것이 없어요. 지금, 아주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건강을 주셔서 제 나이로 믿어지지 않을 만큼 건강합니다. 매일 운동할 수 있는 여건과 고향의 후배들을 도울 수 있으니 더 바랄 것이 없지요.”

송아지 판 돈으로 더 넓은 세상을  
“12살이 되던 해 6‧25가 일어났지요. 배부르게 먹는 것, 학교 다니며 공부할 수 있는 것이 꿈이었지요. 전쟁 중에 목면초등학교를 다니고(1954년 졸업, 14회) 서당에서 5년 동안 한문을 배웠는데, 늘 공부가 더 하고 싶었어요. 17살에 형님한테 송아지 한 마리 팔아 달라하여 그 돈을 가지고 서울로 왔습니다. 모든 게 낯설었지만 정말 열심히, 닥치는 대로 일 했어요. 철근공급업체를 다녔는데, 성실하고 책임감 있다고 인정받았지요.” 

30대에 철근 도매상을 운영하며 철강산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밤을 낮처럼 일한 덕으로, 사업은 성장을 거듭했고 ‘무서운 철의 사나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사업을 확장했습니다. 86년에는 서울종합철강(주)로 법인 전환을 했고, 돈을 많이 벌어 2001년에는 역삼동에 ‘서울빌딩’도 세웠습니다.  
“뛰어난 경영전략요? 운이 좋았지요. 노력과 제 특유의 친화력은 인정하지만(웃음), 법인 전환 뒤로 건설업이 호황이었어요.”
서울종합철강은 14년 만에 연간 매출액이 천억 원에 달하는 한국 최대의 철강유통회사가 되었습니다. 

“사업을 하다 보면 힘든 시기가 반드시 몇 번은 옵니다. 사업은 나 혼자만의 이익이 아닌, 상대와 함께 발전하도록 도와야 한다는 평범한 순리를 원동력으로 삼고 실천했어요. 경영전략이라기보다는 신용이죠. 첫째도 신용, 둘째도 신용, 신용이 최우선이었습니다.” 
좌절하고 포기했다면 지금의 ‘인당장학재단’은 존재하지 못했겠지요. 함께 잘 살아가는 방법을 끊임없이 추구했습니다. 사업이 잘될 때는 고향의 주위 사람들에게 적극 권하며, 사업 수단도 알려주었습니다. 

꼭 해보고 싶은 장학재단
송아지 판 돈으로 올라온 서울에서 자수성가했지만, 마음은 늘 고향에 가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이 떠오르고, 가난으로 공부를 더 하지 못한 미련과 고향마을이 늘 아른거렸습니다. 1970년대, 캄캄한 신흥리 마을에 교량공사와 전기시설비를 지원해 밤을 낮처럼 밝혔습니다. 1980년도에는 목면면민체육회를 만들었습니다. 

2022년 12월, 고향 정산고등학교에 사랑의 장학금을 기탁한 윤종일 회장.
2022년 12월, 고향 정산고등학교에 사랑의 장학금을 기탁한 윤종일 회장.

“가정형편으로 배고픈 것이 가장 힘들었지만, 더 안타까웠던 것은 학업을 지속하지 못한 것이었죠. 그래도 목면초는 꿈과 인생의 길을 배운 고마운 곳이지요. 2남 1녀 중 막내였는데,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형님이 보살펴주었지요.” 
“내가 어려웠던 것처럼, 어려움 속에서 공부하는 고향의 후배, 나의 고향을 돌보고 도와야겠다는 꿈이 생기더라구요. 사회생활을 하면서부터 어려운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어요. 어렵게 공부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돈 많이 벌어서 학비 없어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추억을 만들어준 목면초등학교의 후배들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했습니다. 어려웠던 시절이 장학재단의 모태가 됐습니다. 2008년, 10억여 원을 들인 ‘인당장학재단’이 드디어 설립되었습니다. 특별체육기금, 제주도 수학여행 경비지원 등 목면 출생 신생아에게는 출산장려금도 주었습니다. 

“고향과 어려운 후배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시작하여 많은 분에게 혜택을 주는 것도 만족할 일인데, 오히려 저에게 상을 주시네요. 국민훈장 동백장, 청양군민대상, 기부천사라는 별명도 함께요. 무엇보다 감동은 지역주민이 저에게 진실한 고마움을 담아 세워주신 비석이지요. 늘 감사합니다.” 
목면사무소에는 목면 주민들의 마음이 담긴 공적비가, 신흥1리 입구에는 선행비가 있습니다.

골프사랑, 몸사랑
“서른 살부터 골프를 했습니다. 71년부터 10년간 충남대표선수로 활동을 했고, 81년 미국에 있을 때는 뉴욕주 한인회 대표선수로 발탁되기도 했지요.” 
-혹시 프로골퍼는 생각 안 하셨나요?
“골프는 사업상 시작했지만, 운동도 되고 골프공이 홀에 쏙 들어가면 재미도 있어 열심히 했죠. 골프에 재능이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직업이 되었다면 그렇게 좋지는 않았을 것 같네요. 취미나 운동은 취미일 때 재미와 보람이 있는 것이지요(웃음). 골프자랑 좀 할까요? 이글(1홀의 기준 타수보다 2타수 적은 타수)은 수십 번 했고, 평생 한 번도 하기 힘들다는 홀인원(볼을 한 번에 넣는 것)도 5번을 했습니다. 정말 짜릿하죠(웃음).”

“골프가 사업에 많은 도움이 된 것은 사실입니다. 현대제철이나 동국제강, 한보철강 임원들과 자주 골프를 치면서 사업도 성장했으니까요.”
“건강관리에 좋죠. 걷는 운동과 근육운동이 되고, 일찍 일어나니 부지런해져서 좋구요. 4명이 몇 시간씩 함께 하니 친분 교류도 좋고, 다양하게 새로운 친구를 사귈 수 있어서 좋지요. 나쁜 점은 경제적으로 부담이 될 수도 있다는 것 정도.”  
4계절 모두 좋아하지만, 골프 하기 어려운 겨울은 별루 정도로 골프사랑이 많습니다. 
 
“달걀 1개, 잣 한 스푼, 호두 서너 알, 말린멸치(청어) 20~30마리로 아침을 먹고, 연습장에서 2시간, 9홀 골프장에서 2시간 운동을 하고, 점심을 먹고, 커피집에서 2시간, 수영장에서 1~2시간, 4~5시 사이에 저녁, 8~9시에 취침, 새벽2시 일어나서 까치발로 제자리걸음을 20분(3천보) 합니다. 다시 1시간 반 잠을 자고 일어나서 20분 까치발 제자리걸음, 다시 잠을 자다 6시 30분 기상, 또 까치발 제자리걸음을 20분 합니다. 제 건강기법이죠(웃음)”            

이사장님에 대해 “돈 있으면 나도 이 양반(인당)처럼 했으면 좋겠다.”, “이런 큰마음의 사람을 만난 것이 큰 축복이며 행복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후배들에게 한 말씀 해주시죠. 또 이 시대의 ‘어른’이란 어떠해야 하는지 여쭙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를 겪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지금 당장 눈앞의 상황이나 현재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그것들이 시간이 지나고 보면, 인생에서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과 깨달음이 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지금 어떤 문제나 상황으로 많이 힘들지라도, 멀리서 바라보고 더 먼 미래를 생각할 수 있는 안목을 갖추었으면 좋겠어요.”, “나이가 들면 어른이라지만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사람을 어른, 참된 어른이라 생각하지요.”      

칠십 후반의 새로운 꿈과 행복
“제 아버님은 내가 태어나자마자 돌아가셨답니다. 어머니는 외모나 성격이 얌전하고 둥글둥글하셨어요. 인자하셨고, 한국의 어머니상 같으셨지요.(침묵) ‘사랑합니다’라고 해 드리고 싶네요. 한 번도 못 해 드린 것 같아요,” 
  
“집사람 따라 하나님을 믿게 됐습니다. 정식 신학을 배우지는 못했지만, 5년 전부터 명예전도사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있지요. 태국 리버콰이의 한인교회에서도 전도사로 활동했어요. 태국에는 미얀마에서 일하러 오는 청년들이 많은데, 그들의 맑은 영혼과 착한 성품에 감동합니다. 미얀마 청년 옛나잉도 알게 됐지요.” 
태국의 한 골프장 내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더 많은 이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야 하겠다는 마음이었고, 타오르는 생각의 결과였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모든 욕심은 세상에서 난다’고 하셨는데, 고희(70세)도 지나고, 산수(80세)도 넘은 제가 뭔 욕심이 있겠습니까, 하늘이 주신 인생의 마지막 끝자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웃음) 다만, 고향의 장학사업과 새롭게 얻은 선교사업에 남은 시간을 쓸 뿐이지요.”
소나무를 좋아하고, 노래방 18번은 칠갑산입니다. 나훈아와 조용필의 팬입니다. 남을 도울 때와 정진숙권사(부인)가 해 주는 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행복합니다. 

“‘베풀고 나눈다’는 의미는 내가 가진 것을 나누어 준다는 마음이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진심으로 위하고 생각하는 마음으로, 그 대상이 잘 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 진정한 나눔이지요. 사람은 혼자 살 수 없잖아요? 다른 이들과 함께하는 것이 행복의 시작인 것 같아요. 장학금 전달하는 순간, 행복하죠.(웃음)”
다시 태어나도, 현세와 같이 남을 위한 삶을 살고 싶다는 인당이사장님. 내세에도 청양 땅에 태어나셨으면 좋겠습니다.     

<김현락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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