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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밤 외로운 밤, 벌레 우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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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밤 외로운 밤, 벌레 우는 밤
  • 청양신문 기자
  • 승인 2022.10.04 11:05
  • 호수 146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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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남 경기도 고양시 거주(대치면 상갑리 출신)

달빛이 코스모스 꽃 잎 위에 내려진 밤이슬을 바라보는 초가을 저녁이었다. 분교장 선생님의 인사 말씀도 끝나고 1,2학년들의 노래자랑도 마쳤다. 선생님이 치시는 오래된 풍금에서는 선율이 흐르고 하얀 무용복을 입은 아이들은 모두 같은 동작으로 춤사위를 펼치고 있었다. 구경꾼들은 기침 소리 하나 없이 숨을 죽이며 무대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책상을 이어서 붙이고 벽을 광목천으로 가린 임시 무대였다. 

유철남
유철남

마을 안에 있는 초등학교의 학예 발표회는 마을 사람 모두의 행사였다. 학예회는 매년 하는 행사가 아니었다. 전교생 120여 명에 교사가 세 명 뿐인 작은 분교, 그것도 가을걷이로 일손이 바빠 결석을 수시로 하는 농촌학교에서 장시간의 연습이 필요한 공연을 준비하는 것은 결코 수월한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열정어린 선생님이 오시면 학예회도 하고 운동회도 성황하게 치르고 학년말의 사은회까지 야무지게 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냥 하는 둥 마는 둥 넘어가기가 예사였다. 외부 세계와의 연결고리라고는 그나마 라디오가 최첨단이었고 볼거리라고 해야 여름밤에 군청에서 틀어주는 반공영화가 전부이던 때, 노래와 연극 무용까지 망라한 학예회는 작은 마을의 종합예술 잔치였고 큰 호사였다. 

음악 소리를 따라 무용은 이어지고 무대 위의 소녀들의 손끝이 하나 같이 원을 돌다가 서서 먼 달 쪽으로 뻗어 올리면 일렁이던 촛불도 유리등 안의 남포 불도 멈추는 것 같았다. ‘초가집 뒷산 길 어두워 갈 때, 엄마 품이 그리워 눈물 나오면 마루 끝에 나와 앉아 별만 봅니다.’ 그날따라 서울에 계신 부모님 생각에 목젖이 묵직하고 코언저리가 시큰했다. 노랫말 구절이 모두 내 얘기만 같았다. 된장국에 밥을 말아먹고 자다가 목이 말라 일어나서 마루에 나와 중천에 휘영청 떠 있던 달을 보았을 때처럼, 울컥하고 무언가가 다가왔다.

아이들은 작은 물고기처럼 똑같은 동작으로 움직이고, 다시 멈추고 하다가 모두 처음 섰던 자리로 돌아가서 무용을 마쳤다. 모두 이른 아침 밤을 줍고, 감나무 아래서 소꿉놀이를 하던 동네 아이들이었다. 동그라미처럼 초가지붕처럼 그리고 가을 달처럼 부드럽고 착한 아이들이었다. 한 줄씩 인사를 하며 무대 뒤로 들어가는 아이들을 보고 구경꾼들은 모두 한마디씩 하였다. “어쩌면, 다들 저렇게 이쁘게 잘들 헌다냐.” 

마지막으로 5,6학년의 ‘화랑 관창‘과 ’혹부리 영감‘ 연극이 이어졌다. 소나무, 대나무로 칼과 창을 만들고, 할아버지 저고리로 무사의 옷을 지었다. 빨간 풍선은 혹부리 영감의 혹이 되었다. 관객들은 화랑 관창의 용기에 아낌없이 박수를 보냈고, 욕심 많은 영감이 혹을 하나 더 붙이는 장면에서는 큰 웃음소리와 함께 통쾌함으로 박수를 보냈다. 배우들이 모두 나와서 줄을 맞춰 경례를 하고나서, 선생님의 ‘조심히 안녕히 돌아가시라’는 인사를 끝으로 구경하던 사람들은 운동장 바닥의 모래를 털고 일어났다. 

달도 어느새 고개를 바짝 들고 봐야할 만큼 정수리 위로 훤하게 솟아올라 있었다. 학예회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는 발등으로 밤이슬이 잔뜩 채였다. 풀잎에 맺힌 밤이슬이 작은 구슬 같았다. 논두렁길이 좁아서 한 줄로 길게 늘어서야 했다. ‘가을밤 고요한 밤 외로운 밤 벌레 우는 밤~’ 마음속에서도 작은 벌레들이 가을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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