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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이야기 같은 인생 – 나이 듦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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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이야기 같은 인생 – 나이 듦에 대하여
  • 청양신문 기자
  • 승인 2021.12.29 10:07
  • 호수 14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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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소박한 사물과 사람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한 사람이 먼저 가고,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루신, 「고향」 부분 

구름 속 수분이 얼어서 내리는 모든 것이 눈입니다. 눈 속 수증기의 양에 따라, 내리는 모양에 따라, 내린 양에 따라 눈의 이름이 다릅니다. 포슬포슬 함박눈, 가랑가랑 가랑눈, 자잘자잘 가루눈, 갑자기 내리는 폭설은 소나기눈입니다. 빗방울이 갑자기 찬바람을 만나 얼어 떨어지는 싸락눈, 싸락눈보다 크고 단단한 누리(우박)도 있습니다. 발처럼 죽죽 내리면 눈발, 세찬 바람에 몰아치면 눈보라, 쌓인 눈이 흩날리면 눈갈기, 눈안개, 진눈깨비도 있습니다. 적게 내린 자국눈, 살짝 내린 살눈, 많이 쌓인 잣눈·길눈, 밤에 내린 밤눈 등도 있지요. 겨울에만 받을 수 있는 자연의 선물입니다. 

한 해의 마지막 주간입니다. 한 살의 나이가 덧대졌습니다. 눈 선물처럼 인생에도 한 해의 선물이 막을 내립니다. 누구에게는 선물일 수도 있고, 또 누구에게는 무거운 짐이 되기도 하겠지요. 환하고 반짝이며 알록달록한 젊은이에게는 선물이, 무채색 회색빛 노인에게는 짐이 되겠지요. 대부분의 사람은, 스스로가 늙었다는 생각이 들면 인생에서 쇠약해져 가는 길로 접어든 것 같아 답답하고 어두워집니다. 

모든 나이 듦이 존엄하고, 다양한 나이대가 서로 특별한 혜택을 주고받으며 연대하는 사회를 꿈꾸는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이 있습니다. 나이 듦을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공부를 하는 연구소로, 성평등·인권·존엄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연구활동가들과 시민들이 모여 만든 단체입니다. 시간·나이 듦·노년·죽음을 정치적 의제로 만들어내고, 삶을 직선의 달리기로 환원하지 않고 시간에 대한 새로운 성찰과 태도를 만드는 것이 여러 목적 중의 하나입니다. ‘마음껏 나이 드는 일’이 조금씩 더 가능해질 거라고 믿는 연구활동가들은 즐겁게 반성하고 명랑하게 공부합니다. 

책상 밑에 돌탑처럼 쌓아놓은 책을 봅니다. 자기개발서도 있고, 동화책도 있으며, 소설책, 에세이도 있습니다. 지난 일 년 동안 모임을 하며 읽은 책입니다. 신데렐라가 되어 호박으로 만든 마차를 타기도 했으며, 기이하고 눈부셨던 지식인 벤야민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인권의 현장에서 싸우는 사람들, 이 세상의 거대한 비참과 불의에 저항하는 기적 같은 존재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부끄럽기도 하였습니다. 아무리 좋은 관계라도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육체의 삶은 모두 수그러들었어도, 굴하지 않고 저물어가는 노화의 빛마저 무색하게 하는 추억과 당당한 존재감’에 밑줄을 긋기도 하였습니다. 

글이 주는 기쁨만이 아니라,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살면서 맺는 어느 관계보다 즐거움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기준도 없고 평가도 필요 없는, 대가 없는 즐거움이었지요. 
글을 읽으며, 내가 감추고자 하는 나의 수치는 무엇이며, 마음 밑자락에 웅크리고 있는 나의 상처는 또 무엇인가, 내가 좋아하는 상태와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하였습니다. 책을 덮고 나면 늘 그렇듯이 생각도 의문도 사라지지만, 명랑한 은둔자로 감정적인 정직에 충실하고자 하였습니다. 

듬성듬성, 남아있는 눈에 구멍이 뻥뻥 뚫렸습니다. 사람들 모두 각자 자기만의 특별함을 지닌 것처럼, 눈도 구름 속 환경에 따라 모양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더 신비롭습니다. ‘눈 위에 서리 친다’, 설상가상 불행이 엎친 데 덮쳐 일어난다는 속담입니다. ‘기침에 재채기’, ‘하품에 딸꾹질’도 있습니다. 살면서 부닥뜨린 이런저런 불행을 기침에 재채기 정도로만 받아들일 수 있다면, 하품에 딸꾹질 정도로만 느낄 수 있다면, 불행이 눈이나 서리 정도라면, 곧이어 찾아올 봄날을 기다리며 얼마든지 견뎌 줄 수 있겠지요. ‘이렇게 살아도 제법 좋은 삶이었다’고 너그럽게 웃어줄 수 있을 듯합니다. 
 
눈은, 땅속에 스며들어 봄철 가뭄을 덜어줍니다. 늘 물이 부족한 길고양이들에게 목을 축이는 생명수이기도 합니다. 보리싹에게는 이불이 되어주고, 땅에게는 온기가 흩어지는 것을 막아 줍니다. 작은 실천을 하는 작은 몸짓, ‘희망’입니다.    

햇살이 좋아 창문을 열자 후다다닥 새들이 날아갑니다. 관리실아저씨를 힘들게 했던 새들입니다. 가지가 잘 뻗은 커다란 나무에 앉아서 똥을 찍찍 내려 싸는 통에, 아저씨는 일 년 내내 똥 청소를 하였습니다. 늘 손에는 새를 쫓는 작대기가 들려 있었습니다. 아마도 관리실아저씨의 새해 희망 속에는, 내년에는 제발 새들만 날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작은 소망도 있을 듯합니다.

다시 한 살의 나이가 옵니다. 나 아닌 상대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지혜롭고 우아하게 나이 들기를 꿈꿉니다. 나에게 누군가가 그랬듯이, 누군가에게도 언젠가는 또 다른 삶의 중요한 시작점이 될 수 있도록, 그 문을 열어주는 사람이 될 수도 있겠다는 희망 또한 갖습니다. 좋은 인생은 좋은 이야기를 쓰는 것과 같으니까요. 

추신: 지금까지 ‘맑고 소박한 사물과 사람들’을 보고 읽으며, 함께하신 청양신문 독자님들께 고마움의 인사를 드립니다. 새해에는 새로운 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김현락 지면평가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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