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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어가는 가을, 깊어가는 향 - 계수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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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어가는 가을, 깊어가는 향 - 계수나무
  • 청양신문 기자
  • 승인 2021.11.08 16:42
  • 호수 14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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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소박한 사물과 사람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나라로’-윤극영 노래글 「반달」
 
곧은줄기에 부챗살처럼 가지가 뻗었습니다. 달랑달랑 노랑물이 든 무성한 잎을 봅니다. 동글동글하니 참 예쁩니다. 볼수록 귀엽고 사랑스럽습니다. 은은하니 달콤한 향도 납니다. 설화 속의 나무, 동요 속의 나무, 계수나무입니다. 가만히 귀 대고 있으면 노랑빛깔 속살거림이 들려올 듯합니다.

우리나라엔 옛날부터 달나라에 계수나무가 살고 있다는 설화가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색동회 회원이었던 윤극영님은 나라를 빼앗긴 어린이들에게 ‘아름다운 꿈과 용기와 희망을 주는 동요를 부르게 하자’고 주장하며,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동요 「반달」을 발표했습니다. 「반달」 노래글로 인해 계수나무는, 어린이뿐만 아니라 전 국민이 다 아는 나무가 되었습니다. 

계수나무는 암나무와 수나무가 따로따로입니다. 잎이 나기 전에 꽃이 핍니다. 잎겨드랑이에 한 송이씩 암꽃과 수꽃을 각각 피우지요. 암꽃과 수꽃, 둘 다 꽃잎이 없습니다. 아주 작은 서너 개의 암술과 수십 개의 수술만 연한 홍색으로 내놓을 뿐입니다. 향기도, 눈에 확 띄는 화려하고 큰 꽃잎도 없는 계수나무의 암술과 수술은 바람에 의해 가루받이를 합니다. 꽃잎이 없어 바람의 힘을 얻는지, 바람으로 인해 꽃잎이 사라졌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꽃 진 자리에는 바나나 모양의 작은 열매가 맺힙니다. 열매 속에는 날개 달린 씨앗이 들어 있어, 영글면 바람을 타고 날아갑니다.

계수나무 수꽃
계수나무 수꽃

꽃자루 옆에서 붉은색 잎자루가 있는 잎이 나옵니다. 올망졸망한 동그란 잎들은 어릴 때도 예쁩니다. 부채꼴 잎맥이 선명한 잎은, 앞면은 초록이지만 뒷면은 흰색입니다. 
계수나무는 환경을 크게 가리지 않고 빨리, 크게 잘 자랍니다. 줄기를 베어버려도 뿌리에서 싹이 새로 돋아납니다. 키는 20미터도 넘게 자라지요. 줄기가 올라가며 갈라지는 가지로 나무의 모양이 우아합니다. 비틀림이 없고, 옹이도 없고, 나뭇결이 좋아 쓰임도 많습니다. 가구나 바둑판, 악기 등을 만들지요. 

꽃이 필 때도 없었던 향은, 열매를 맺고 씨앗을 날려 보낼 때에도 없었던 향은, 초록잎이 노랗게 변하면서 향주머니를 살포시 비집고 나옵니다. 봄부터 여름을 거쳐 가을까지, 꽁꽁 묶어두었던 향기를 노랗게 물감 풀 듯 늘어놓는 것이지요. 낙엽이 한 장 두 장 날릴 때부터 가을이 깊어가는 내내 옅은 향기로 주변을 달달하게 합니다. 낙엽이 쌓이면 향기는 더 짙어집니다. 

계수나무 암꽃
계수나무 암꽃

달콤한 향기는 잎에서 납니다. 노랗게 잘 물든 잎이 낙엽이 되어 부서지면서 내는 것이지요. 잎 속에는 ‘말톨’이라는 성분이 있어, 잎의 세포가 약해지거나 죽어갈 때 나오는 것이랍니다. 말톨은 설탕을 오랜 시간 불에 졸여서 캐러멜을 만들 때 나오는 성분입니다. 그러니, 솜사탕 향이 나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그런 이유로 서양에서는 캐러멜나무라 부르기도 합니다. 
계수나무 아래서 사랑을 고백하면 이루어질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저녁 햇살에 눈 부신 노랗고 통통한 하트 모양의 잎을 올려보며, 은근 달콤한 솜사탕향기에 푹 싸여있다면 누구라도 그럴 것 같습니다. 
 
옛날부터 계수나무는 귀하고 아름다운 것을 나타낼 때 비유적으로 쓰였습니다. 물을 헤쳐 배를 나가게 하는 아름다운 노와 삿대를 ‘계도난장’, 높고 좋은 요릿집을 ‘계루’, 훌륭한 궁전이나 집을 ‘계궁·계전’이라 하였습니다. 
우리 옛 어르신들의 문학에서 계수나무는 달에 사는 고귀한 식물로 상징되었습니다. 속인이 닿을 수 없는 ‘귀한 존재’로 여겼습니다. 향기가 독특하고 은은하여, 성품이 온화하고 고결한 사람을 칭송할 때 계수나무의 향기(계복(桂馥))에 비유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잎이 윤나고 매끄러우며 더러운 곳에서도 흙이나 먼지가 잘 붙지 않는 특성과 연관시킨 것이지요. 또한 계수나무로 이룬 숲은 세속을 피해 산속에 숨어 사는 사람의 거주처로 나타내기도 하였습니다. 

계수나무 열매
계수나무 열매

반면, 정약용은 달 속의 계수나무는 깨끗한 달에 존재하는 오점이라며, 씻어버려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만 혼자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어 방황할 뿐이라는 시(다산시문집 제4권 고시27수)를 남겼습니다. 이황 역시 밝은 달을 완벽하게 만들 수 없음을 안타까워 했습니다. 현실적으로 아름답고 고귀한 계수나무지만, 도덕적 지향점을 가로막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달에 있는 계수나무가 완벽을 추구하는데 걸리적거린다고 생각했지요.  

하늘만 보며 자라던 푸른 날에는 풀어놓지 못한 마음을, 한 줌 흙으로 돌아가며 내놓는 계수나무의 향그러운 마음을 깊게 받아들입니다. 자박자박 노랑잎을 밟습니다. 몸에서 단내가 날 듯합니다. 상처에서 나는 향, 오래도록 상처를 숙성시켜 내는 향, 연륜의 향, 이 계절이 주는 선물입니다. 
     <김현락 지면평가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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