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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소박한 사물과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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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소박한 사물과 사람들
  • 청양신문 기자
  • 승인 2021.08.30 14:51
  • 호수 14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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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빨간 색깔의 거짓 – 꽈리

‘나직한/담/꽈리 부네요//귀에/가득/갈바람이네요//흩어지는 흩어지는/기적(汽笛)/꽃씨뿐이네요’ -박용래의 시 「추일」 전문

배는 하늘을 향한 채 세 쌍의 다리를 의식 없이 흔들고 있습니다. 제 본연의 책임을 다하고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숫매밀까, 암매밀까? 그렇게 오래도록 땅속에서 살다 겨우 한 달도 못 살고 죽어가니 참 불쌍하다”고 친구가 말합니다. “숫매미. 애벌레로서의 기간이 길 따름이지, 결코 짧은 생은 아닌 것 같어. 더구나 곤충치고는”. 여름내 매미는 ‘맴맴~’이나 ‘차르르~’, ‘쓰름쓰름~’ 대신 길고 크고 억세게, 공사장에서 쇠 자르는 소리를 냈습니다. 

백중도 지나고 처서도 지났습니다. 길가의 한쪽 공터는 둘쑥날쑥한 채소와 꽃과 풀들로 꽃밭을 이뤘습니다. 상추는 가늘고 긴 줄기 끝에 작은 솜방망이 같은 꽃을 피웠고, 강아지풀의 연녹색 이삭에도 자줏빛이 섞였습니다. 여름 풀밭에 드문드문 가을색이 들었습니다. 넓적한 푸른 잎 사이로 붉고 환한 열매가 있습니다. 주홍색의 꽈리 열매입니다. 꽈리에 대한 어린 날의 기억이 퍼뜩 떠올라 보는 순간 섬뜩해집니다. 

언니들은 꽈리를 잘 불었습니다. 꽈르륵 꽈르륵 주황색 열매에서 나는 소리는 듣기도 좋고 재미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꽈리가 불고 싶었습니다. 수북한 풀 속에서 꽈리 열매를 한 알 한 알 고르는 중에, 눈썹 없는 긴 동물의 눈과 딱 마주쳤습니다. 엄마야, 얼마나 크게 소릴 쳤는지, 오히려 뱀이 놀라 사라졌습니다. 그 뒤론 멀리서 꽈리 모양만 보여도 빙빙 돌아다녔습니다. 
 

가지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 꽈리는 길가나 빈터, 산비탈이나 풀밭에서 잘 자라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땅속줄기가 길게 뻗어 번식합니다. 잎은 크고 넓고 푸릅니다. 연한 노랑을 띤 흰색꽃은 잎겨드랑이에서 나온 꽃자루 끝에 한 송이씩 핍니다. 꽃이 지고 열매를 맺으면, 통같이 생긴 꽃받침은 하트 모양으로 자라며 열매를 감쌉니다. 꽃받침에 감춰진 열매를 ‘꽈리’라 부릅니다. 열매의 이름을 따서 풀의 이름도 붙여졌습니다. 
열매 모습이 허파꽈리를 닮아 이름 붙여졌다 하는 ‘꽈리’는 때꽐, 홍낭자, 왕모주, 고랑채, 홍고랑, 등롱초, 야호초, 푸께 등으로도 부릅니다. 꽐, 꼬아리, 까리, 꽈루, 꽤(꿰)리, 괘리 등 각 지역마다 부르는 이름도 다릅니다. 제주도에서는 풀처귀로 불립니다. 

초록빛 꽃받침통이 붉은 주홍색 주머니로 변해갑니다. 꽃받침주머니 속의 열매도 맑고 영롱한 빛으로 익어갑니다. 주머니를 찢으면 퍽하고 공기가 빠집니다. 열매가 주머니에 비해 작은 것을 보고 옛 어르신들은 “누르면 바람이 꺼질 거면서 커 보이려 함은, 꽈리나 사람이나 살면서 허풍도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라 말했습니다. 겉이 익어야 속도 익는 꽈리를 보고는, 겉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교훈도 품고 있다고 하셨지요. 그래서인가 꽈리의 꽃말은 거짓과 수줍음입니다.

‘꽈리’라는 이름이 들어간 꽃들은 꽃받침이 꽈리의 꽃받침과 비슷하거나, 열매가 꽈리 열매와 비슷합니다. 열매가 익은 후에도 녹색인 땅꽈리, 꽃이 진 후에도 꽃받침이 주머니를 만들지 않아 열매가 보이는 알꽈리, 꽃의 안쪽에 황색의 둥근 무늬가 있으며 열매와 주머니가 녹황색으로 익는 노란꽃땅꽈리, 허브류로 알려진 페루꽈리, 연보라색 꽃이 오후에 피었다가 다음 날 아침에 지는 나도수국꽈리 등 모두 가지과의 식물들입니다. 

빨갛게 잘 익은 열매는 단맛과 신맛을 냅니다. 한방에서는 뿌리를 ‘산장근’, 열매를 ‘괘금동’이라 하며 생약으로 사용하기 위해 포기 전체를 말린 것을 ‘산장’이라 합니다. 소변을 잘 나오게 하고 기침을 가라앉히며, 독을 풀어주고 열을 내리는 효능이 있답니다. 황달에는 꽈리뿌리를 짓찧은 즙을 마신답니다. 
어린 날 살던 집 뒤꼍 처마에는 늘 마른 꽈리열매와 뿌리가 걸쳐 있었습니다. 돼지고기를 먹고 체한 데에는 꽈리뿌리 달인 물만 한 것이 없다며 해마다 아버지는 장독대 옆에 꽈리를 심었습니다. 

붉게 물든 꽃받침주머니로부터 주황색으로 단단하게 익은 열매를 뗍니다. 열매꽈리를 말랑말랑해질 때까지 손가락으로 조물조물합니다. 가시나 바늘로 열매속에 있는 씨를 살살 발라냅니다. 조금만 잘못하여 열매의 껍질을 건드리면 꽈리 열매는 영락없이 터져버립니다. 얼마나 많은 열매를 터트려야 만이 꽈르르~ 불 수 있는 꽈리를 만들 수 있을지 모릅니다. 온 정성을 다해 무사히 열매 속의 씨를 다 빼낸다 해도 꽈리를 부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꽈르르르륵, ‘아랫입술과 이사이에 꽈리를 놓고 윗니로 살그머니 누르면 바람이 빠지면서 소리가 난다’고 언니는 알려줬지만, 아무리 해도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꾸욱꾸욱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나던지, 아니면 터져버렸습니다. 만든 꽈리는 잠잘 때 물에 담가놓습니다. 마르면 부서지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야 내일도 모레도, 꽈르륵 불 수 있기 때문이지요. 
예전에는 문방구에서 고무로 만든 꽈리를 팔기도 했습니다. 그래봤자, 이것도 저것도 불어보지 못한 채, 꽈르륵 거리는 언니들 입만 바라보았을 뿐입니다. 
 
바람이 불고 비가 줄기차게 내리자, 기온이 떨어집니다. 숫매미의 체온도 낮아집니다. 아직 여름은 남아 있는데, 숫매미는 더 이상 소리를 낼 수가 없습니다. 말매미 가족들이 살았던 나무의 나무껍질은, 치열하게 여름을 보낸 말매미의 알들은 포근하게 품어줄 것입니다. 장마가 스쳐 간 자리, 나무 밑 여기저기에서 움직이지 않는 매미를 봅니다. 성충이 될 때 벗은 허물처럼, 여름 내내 소리를 냈던 매미도 검게 말라가고 있습니다. 

<김현락 지면평가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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