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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잠깐, 스쳐 가는 향긋함 - 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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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잠깐, 스쳐 가는 향긋함 - 살구
  • 청양신문 기자
  • 승인 2021.07.05 15:34
  • 호수 14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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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소박한 사물과 사람들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만나는 사람마다 등이라도 치고지고/뉘 집을 들어서면 반겨 아니 맞으리//바람 없는 밤을 꽃그늘에 달이 오면/술 익는 초당마다 정이 더욱 익으리니/나그네 저무는 날에도 마음 아니 바빠라’- 이호우 「살구꽃 핀 마을」

“살구여. 뒤꼍에 한 낭구가 있어서 따와 봤네” 시장 입구 좌판에 조그맣고 노란 과일이 있습니다. 지나쳐오다, 얼핏 스치는 상큼함에 다시 뒤돌아갔습니다. 노랗게 잘 익은 살구에서는 빛깔만큼이나 싱싱하고 달콤한 향이 납니다. “나두 그리야 자연한티 들 미안허지.” 살구 한 알을 더 넣어주며 할머니가 말씀하십니다. 부드러운 껍질과 연한 살이 맛있습니다. 매끈한 씨도 살에서 쉽게 떨어집니다. 잠시 머무는, 한눈팔면 놓치는 계절이 주는 달고 향긋한 기운입니다. 

봄밤을 밝히는 것들, 매화가 절정을 이룰 때 살구꽃은 벚꽃과 함께 피기 시작합니다. 거리를 밝히는 가로수로 줄지어 심어진 벚꽃과는 다르게, 살구나무는 서너 집 걸러 한 집꼴로 마당 한쪽이나 뒤꼍에 홀로 서서 소박하고 아름다운 꽃으로 자신을 환하게 드러냈습니다. 원산지가 중국임에도 우리나라의 방방곡곡에서 가장 흔했던 나무 중 하나였던 살구나무를 고향의 나무로 손꼽는 것도, 어느 지역에서나 볼 수 있고 자랄 수 있는 나무이기 때문이었지요. 

7천 년 전 신석기 시대 초기의 유적에서 살구씨가 발견되었으며, 살구나무는 중국에서 야생으로 자라기 시작하였답니다. 우리나라에도 삼국시대 이전부터 있었던 살구는 대추, 복숭아, 자두, 밤과 함께 전통적으로 먹어 온 5과에 포함되었습니다. 옛 어르신들은 마을이 이루어진 곳이면 살구나무를 심었으며, 제사에 올리는 제물에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자랄 수 있는 강한 적응력으로 살구는 오랜 시간을 화사한 꽃과 열매로 마을에 있었습니다. 
‘살구나무가 있는 마을엔 염병이 못 들어온다, 살구는 음식의 독, 물의 독, 혈액의 독을 막아준다, 살구나무 자라는 집에 살구빛 미인이 난다, 살구 열매가 많이 달리는 해에는 병충해가 없어 풍년이 든다.’ 등 살구에 대한 얘깃거리가 많은 것 또한 옛 어르신들 곁에 친근하게 있었던 탓이겠지요. 

살구나무숲 ‘행림’, 진정한 의술을 펴는 의원을 말하기도 합니다. 중국 오나라의 ‘동봉’이라는 의술이 뛰어난 의사는 치료비를 받지 않는 대신 살구나무를 심게 하였답니다. 몇 년 지나지 않아 주변은 온통 살구나무로 숲을 이뤘습니다. 동봉의사는 살구를 곡식과 바꿔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곳을 ‘동선행림’이라 불렀으며, 훌륭한 의사를 기리고 축하하는 의미로 행림이라 하였다는 얘기가 중국의 옛 책 「신선전」에 기록돼 있답니다. 

달콤한 매실이라 ‘참매’, 살은 먹고 씨의 알맹이는 한약재로 써서 ‘육행’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꽃모양이 비슷한 매화가 양반들이 멋을 내는 귀족나무였다면, 살구나무는 꾸민 데가 없이 수수하게 살아온 서민들의 나무였습니다. ‘빛 좋은 개살구’와 ‘개살구 옆으로 터진다.(못난 것일수록 못난 짓만 한다)’는 부정적인 속담을 가진 개살구나무는 우리나라 토종입니다. 중국 원산의 살구에게, 시고 떨떠름한 맛에 열매의 크기도 작아 자연히 밀려버렸지요. 거기에 이름까지 ‘개’가 붙여졌으니, 요즘은 그나마도 깊은 산에서나 겨우 볼 수 있습니다. 
 

살구는 꽃으로는 눈을, 열매로는 입을 즐겁게 할 뿐만 아니라 나무로는 귀를 즐겁게 합니다. 절집에서 스님이 두들기는 목탁은 살구나무로 만든답니다. 살구나무의 맑고 매끄러운 흰 속살이 내는 소리지요. 특히 개살구나무로 만든 목탁은 더 맑고 청아한 소리를 낸다는데, 열매로 가야 할 맛과 영양이 나무살로 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개와 살구는 상극입니다. 개고기를 먹고 체했을 때는 살구씨가 특효라서, 옛날 개고기 파는 음식점에서는 살구씨를 말려 얇게 썰어 내놓았답니다. 
 
여전히 다른 과일들은 우리의 중요한 먹거리로 남아 있는데, 살구는 찾기 힘든 과일이 되었습니다. 봄과 고향을 떠오르게 하는 살구나무는 미인의 나무, 장수의 나무이지만, 상품성이 떨어져 이익을 내지 못하기 때문이랍니다. 
덕수궁의 ‘석어당’ 옆에는 나이 많은 살구나무가 있습니다. 단청을 입히지 않은 밤색 2층 건물에 연분홍 살구꽃이 피면 정말 예뻤지요. 수도 없이 꽃구경은 하였지만, 열매를 본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살구를 맛보게 한 할머니의 말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생각하며 살구, 살구 부르는 동안 입안 가득 화사하고 달콤한 향이 고입니다. 
<김현락 지면평가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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