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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이웃 - 김덕환 씨, 비봉면 양사리서 인생 2막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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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이웃 - 김덕환 씨, 비봉면 양사리서 인생 2막 시작
  • 이관용 기자
  • 승인 2020.05.04 14:43
  • 호수 13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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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계 대부 농촌 인심에 반해 귀농

“뮤지컬 배우로 40년 넘게 생활하다 인생의 후반기에 새로운 삶을 살고 싶어 귀농을 생각했다. 그래서 서울에서 열린 귀농귀촌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전국 여러 지역을 답사했다. 그러다 ‘여기구나!’하고 정착한 곳이 청양군 비봉면 양사2리다.”
우리나라 뮤지컬계의 대선배로 국내 유수의 작품에 출현하고 있는 김덕환(62) 씨는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주민들의 인심에 반해 청양으로 귀농을 결심했다. 청양으로 주소를 옮기고 서울을 오고가며 공연과 농사로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는 김덕환 씨를 만나봤다.

김덕환 씨
김덕환 씨

타고난 재능 수많은 작품 주연
김덕환 씨는 청양과 인접한 부여군 규암면 출신이다. 초등학교 시절 부모님과 함께 서울로 이사한 뒤 이태원 오산중학교와 안양예술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가 뮤지컬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고등학교 졸업 후 지금은 고인이 된 최창권 작곡가를 만나면서다. 둘의 만남은 1978년 김 씨가 친구들과 함께 최 작곡가의 음악작업을 돕기 위해 작업실을 방문한 것이 계기가 된다.
김 씨는 친구들과 일을 마친 뒤 지친 몸을 달래고자 혼자 음악연습실에서 노래를 불렀고, 마침 방송국 일을 마치고 귀가한 최 작곡가가 그의 노래를 듣게 됐다. 최 작곡가는 한국연극영화예술상 음악상, 대종상, 옥화문화훈장 등을 수상한 저명한 음악가로 뮤지컬협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최 작곡가는 김 씨가 뮤지컬 배우로 재능이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면담 후 공연계약을 체결했다. 김 씨는 뮤지컬 공연이 처음인데도 불구하고 배우생활 10년차와 동등한 임금을 받을 정도로 대우를 받았다. 그만큼 최 작곡가가 김 씨의 역량을 높게 봤고, 우리나라 뮤지컬계의 기대주로 여겼다.
김 씨는 이후 아이다, 태양왕, 두 도시 이야기, 레미제라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영웅, 황태자 루돌프, 명성황후, 아이언마스크 등 수많은 작품에 출연하며 우리나라 뮤지컬 발전에 공헌했다.  

첫 공연 대성공 확고한 입지 다져
김 씨의 첫 공연은 뮤지컬 ‘가스펠’로 스무살 어린 나이에 주연을 맡았다. 무대에서 그는 명배우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완벽한 공연을 소화해 냈고, 관람객들의 반응 또한 뜨거웠다.
김 씨는 “서울시민회관에서 공연이 끝난 뒤 많은 사람들이 나를 만나기 위해 분장실부터 로비까지 약 100미터를 서있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인기를 실감했고, 뮤지컬 배우로 보람과 자긍심을 갖게 됐다”고 회고했다.
‘가스펠’이 기대이상 성공을 거두자 김 씨의 지위와 뮤지컬계 입지도 한층 높아졌다. 또 여러 작품 출연 섭외가 이어지면서 3년간은 다른 일정을 잡지 못할 정도였다.
군 제대 후에도 그의 입지는 탄탄해 서울시 소속 서울시립가무단에서 15년간 활동했고, 한해에 6~7개 작품에 출연할 정도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특히 서울 올림픽을 앞둔 1985년에는 남북교류 차원에서 북한 평양에서 열린 예술공연에 우리나라 대표로 참여, 최고의 전성을 누렸다.

김덕환 씨는 뮤지컬 ‘아이언마스크’에서 ‘아토스’역을, ‘명성황후’에서는 일본공사 ‘이노우에’ 역을 맡았다. 사진출처-Daum
김덕환 씨는 뮤지컬 ‘아이언마스크’에서 ‘아토스’역을, ‘명성황후’에서는 일본공사 ‘이노우에’ 역을 맡았다. 사진출처-Daum

그러나 김 씨가 항상 성공가도를 달린 것은 아니다. 
사업가로 여러 사업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하면서 아픔을 겪었다. 그때 나이는 30대 초반으로 젊은 열정과 욕망이 화근이었다. 첫 사업은 서울 번화가에서 문을 연 갈비전문점, 다음은 레스토랑 등 요식업, 마지막은 환경사업 분야다. 
김 씨는 우리나라 경제위기인 IMF란 시대적 상황과 경영문제 등 복합적인 문제로 결국 사업을 접어야 했다.
김 씨는 “당시는 젊음이란 열정과 패기가 넘쳐 사업을 즉흥적으로 시도했다. 그렇다보니 사업은 마음대로 진행되지 않았고, IMF 등 사회악재가 겹치면서 경영난관을 극복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사업을 정리하고 공연에만 전념하게 됐고 인생교훈이 됐다”고 말했다.

배우는 대선배…동네선 막둥이
“모든 공연계가 그렇지만 나이가 들면 후배들에게 자리를 물려준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점점 작품에서 나를 찾는 제의가 줄어들었고, 나 또한 어린 후배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다. 나만의 시간이 많아지자 인생 2막을 생각하게 됐다.”
김 씨가 삶의 여유를 찾자 생각한 것이 귀농이고, 방송국이 전국 농업기술센터와 연계해 추진한 귀농귀촌학교 프로그램이 도움이 됐다. 귀농지로 선택한 청양군 비봉면 양사2리는 당시 이태재 이장이 마을살림을 맡고 있었고, 이곳이라면 인생 2막이 행복할 것 같아 정착하게 됐다.
김 씨는 “40년 넘는 뮤지컬 경력과 인맥이 넓어 아직도 출연이 이어지고 있다. 이제는 공연보다는 또 다른 삶을 살고 싶다”면서 “공연 일정이 있을 때는 주로 서울 등에서 생활하지만 나머지 시간은 청양에서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가족과 주민에 대해서는 “부인과 자녀들도 나의 삶을 존중하고 주말이면 자주 내려와 전원생활을 즐긴다. 무엇보다 뮤지컬계에서는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대선배이지만, 이곳에서는 나이가 어려 막둥이에 속한다. 주민들이 형·누나 같고, 정을 나누는 일상이 행복하다”고 덧붙였다.

이태재 전 양사2리장(왼쪽)으로부터 나무 가지치기를 배우고 있다.
이태재 전 양사2리장(왼쪽)으로부터 나무 가지치기를 배우고 있다.

농촌 들녘 배경 뮤지컬 공연 꿈
지역에서 김 씨는 오랜 시간 함께 살아온 이웃과 같은 존재다. 그가 뮤지컬계 대배우라는 직함은 농촌에서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동네에서 일손이 부족하면 도와주고 노인들이 필요한 물건을 부탁하면 사다주면서 지역공동체 일원이 돼가고 있다. 귀농 2년차라 농사일이 서툴고 하얗던 얼굴은 햇볕에 그을려 검게 물들어 가고 있지만, 마음만큼은 공연현장에 있을 때보다 뿌듯해하고 있다.
김 씨의 긍정적이고 이웃을 생각하는 밝은 성격에 지역민들도 반기고 있다. 최근에는 그를 비봉면주민자치위원회 위원으로 추천했고, 문화분과위원장으로 추대했다. 그의 재능을 지역 인재양성에 보태달라는 지역사회 부탁에 청소년들을 가르치는 방과후학교 강사로도 활약 중이다.
김 씨는 청양에서 생활하면서 목표를 하나 세웠다. 바로 자신의 경력을 살린 야외 뮤지컬 공연을 야외에서 갖는 것이고, 양사2리에 부지도 매입했다.
김 씨는 “뮤지컬에 대해 모르는 주민들이 많은 것 같고 문화기반도 열악한 것 같다.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마을에서 추진하는 ‘복사꽃 축제’에 맞춰 ‘갈라쇼’를 보여주고 싶다”고 바람을 전했다.
농촌생활에 대해서는 “일상의 편함을 찾았다면 귀농하지 않았을 것이다. 농촌 어르신들의 성실함과 부지런함, 정이 있는 모습이 참 좋다. 농업은 대한민국의 근간이고, 지역발전을 원한다면 농촌과 산업이 공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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