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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독립운동가<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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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독립운동가<6월>
  • 청양신문
  • 승인 1998.06.12 00:00
  • 호수 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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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독립장 이원대선생
경남 신령군에서 태어난 이원대선생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강직하고 의협심이 강해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선생은 일제의 압제와 수탈에 신음하던 동포들의 모습을 보면서 식민지 상황에 대해 자각하게 되었고 또 그 속에서 조국광복을 모색하던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민족독립의 의지를 다졌다.
1933년 6월 조선의열단 국내공작원 안병철의 알선으로 독립투쟁을 결심하고 상해로 망명, 그해 남경 조선의열단 간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하여 소정의 군사훈련을 받았고 34년 3월에는 황포군관학교 낙양분교 한인특별반에서 훈련을 받았다.
이듬해인 35년 낙양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남경, 상해 등지를 왕래하면서 지하공작을 펴다가 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중국 경찰에 협조하여 중국인으로 간첩활동을 자행하는 자들을 미행하거나 색출하여 체포, 숙청케 하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36년 재남경민족혁명당에 가입하였으며 38년 1월에는 장사대회전에 참전하고 이해 10월 호북성 양자강 연안의 한구에서 조선의용대가 창설되자 선생은 제1구대에 소속되어 여러차례 전투에 참가하였고 수시로 안개와 야간을 이용하여 유격전을 구사하였다.
또 파괴공작에도 참여하여 일본군의 통신시설과 교량, 자동차와 전차까지 폭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다른 한편으로 선생은 일본군의 투항을 유도하는 선무공작, 포로심문, 적정탐지 및 정보수집 활동을 펴기도 했다.
43년에는 산서성 부곡에서 중대장으로 소속 부대원을 진두 지휘하고 일본군과 격전을 전개하다가 생포되어 북경으로 압송되었다.
동년 6월 17일, 매일 반복되는 잔혹한 고문으로 인해 32살의 젊은 나이로 순국했으며,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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