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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간 아내묘앞에 통한의 시비 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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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간 아내묘앞에 통한의 시비 세워
  • 김명숙
  • 승인 2001.10.29 00:00
  • 호수 4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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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면 신왕1리 이성구 선생
▲ 2년전 살고 있는 집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 아내 무덤을 만들고 1년뒤 추모비를 세웠으며 세월이 흐른 지금도 묘비를 닦는 걸레와 향이 묘비 한켠에 있다.
“둘이 보던 영산홍 피었는데 님은 어디를 가시었소”

님은 가시었소 / 아 슬프도다 / 하늘이여 땅이여 / 속세의 인연들이 / 너무도 짧은생애 / 힘겨웠던 구비구비 / 몸고생 마음고생 / 가문에 바친세월 / 앞뒤뜰 구석마다 / 님의 향기 짙었어라 / 둘이 보던 영산홍 / 홀로 피는 슬픔이여 / 두고가신 많은사연 / 하늘에 호소하고 / 땅을 치며 통곡했소
님이여 / 조상위해 부모위해 / 몸마음 다 받치고 / 남편위해 자손위해 / 지혜모아 사랑으로 / 자리지킨 세월들 / 해와 달이 지켜주니 / 별빛따라 빛나리다
님이여 / 고왔던 밝은얼굴 / 청단심 뿌리깊어 / 거둬주던 그정성 / 그리움 산을 넘어 / 산새도 자고가는 / 뒷동산 푸른언덕 / 한송이 연꽃되어 / 정든집 내려보며 / 달빛에 홀로누워 / 바람타고 오고가니 / 님의곁 빈자리에 / 그언젠가 가오리다
님이여 / 보상없는 빈손으로 / 어디를 가시었소 / 속세의 인연들이 / 한티끌 순간이요 / 생로병사 우리인간 / 막을길이 없구려 / 모든시름 벗어놓고 / 고이고이 잠드소서(이하생략)

47년을 함께한 아내가 어느날 느닷없이 세상을 떠나자 그에 대한 슬픔과 그리움을 억누를 길이 없어 남양면 신왕리 사는 이성구(68) 선생은 이렇게 ‘님의 향기’라는 글을 써 묘앞에 시비를 세웠다.
이성구 선생이 1999년 9월 4일 백금초등학교 교장을 끝으로 정년퇴직 한 나흘뒤 둘이 청양읍내 나와 짜장면을 한그릇씩 사먹고 들어갔는데 그날 아내가 갑자기 쓰러져 말한마다없이 그렇게 이승을 떠났다.

두살 위 아내(이경희여사. 당시 68세)는 예산농업학교 3학년인 종가집 종손 이선생에게 시집와 그동안 층층시하 시집살이에 집안 살림을 일으키며 말없이 자식들을 잘 키우고 자신을 뒷바라지 했다. 그게 늘 고마워 이선생은 이제부터 잘해주고 살자고 맘 먹었는데 말없이 먼저갔다.

“그렇게 갈줄 알았으면 그날 점심에 짜장면 말고 더 좋은 음식을 사주는 건데 그게 제일 마음에 걸려... 죽기전에 한산모시타운에 가서 큰맘먹고 50만원짜리 모시한복을 사줬더니 그렇게 좋아하며 한달을 걸어놓고 쳐다보다가 내 퇴임식때 딱 한번 입어보고 그냥 가버렸어”
혼자되어 석달동안 딸들이 번갈아 가며 수발하기도 하고 석달은 절에 가서 지내보기도 하면서 일년동안 눈물속에 집뒤 무덤을 오르내리며 아내를 그리워하다 추모의 글과 시를 돌에 새겨 비를 세웠다.
금실은 좋았지만 조강지처가 소중하다는 생각을 못한 것이 죄스러워 빈손으로 혼자 떠난 영혼이라도 위로하기 위해 비문을 직접 짓고 쓰게 된 것이다.

누나처럼 어머니처럼 자신을 내조했던 아내가 죽고나서 함께 보던 영산홍이 마당에 만개했는데 혼자 봐야 할때 외로움과 슬픔은 참말로 깊었다.
우울증이 무엇인지도 알았고 농약 먹고 줄을까도 몇번 생각했지만 차마 죽지 못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한집안의 여성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집안을 위해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던 아내를 어머니라고 생각하고 잘해줬다면 이렇듯 통탄스럽지는 않을텐데….
이성구 선생은 세상의 남자들에게 당부하고 싶다.
“반드시 언제라도 홀로 서는 연습을 하고 죽음을 준비해야 하며 아내를 어머니 모시듯 위해주며 살라”고.

부끄러운 얘기지만 아내나 딸을 별스럽지 않게 여겼는데 자신이 아무런 불편없이 살도록 생전에 내조를 해준게 아내였고 홀로 되었을때 아버지를 진정으로 걱정하며 끼니를 챙겨준 것도 출가외인인 세딸들이었다.
1년동안 생전에 잘 못했던 벌 받는 마음으로 외로움과 슬픔이 가득한 고행의 길을 갔다. 술을 먹을줄 알았다면 폐인이 되었겠지만 평소 서예를 즐겨했기에 그나마 붓으로 세월을 긋을수 있었다.

세월이 약이라는 말이 있듯이 눈물이 마를즈음 시름을 달래기 위해 다니던 보령의 한 서실에서 신옥수(60)여사를 만나 거르다시피한 끼니를 다시 때우게 되었고 양쪽집 자식들도 한시름 놓게 되었다.
적막한 절에서 다 식어가는 향로를 앞에 놓고 땅속에 있는 아내에게 부치지 못할 편지 쓰기를 하루에도 몇차례 그렇게 보낸 세월이 석달. 날마다 무덤에 올라 울던 자신을 위해 먼저간 아내가 신여사와의 인연을 맺어준 것이라 여기는데 그럴만한 일도 있었다.
이제는 어느정도 삶을 지탱하고 있다.

그래서 얼마전부터 아무 준비없이 홀로되어 어찌할바를 모를때 농사져 수확해주고 김장도 해주며 삶을 북돋아 줬던 동네사람들과 밥 한끼라도 사주며 위로했던 교육계 지인들, 마음써준 제자들에게 비록 밥 한끼지만 신세를 갚어 나가게 되었다.
그들을 만날때마다 ‘살아있을때 안식구한테 더 잘하라’는 당부도 잊지 않고있다.

<우리의 이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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