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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실네, 황실네, 청실네 -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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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실네, 황실네, 청실네 - 배
  • 청양신문 기자
  • 승인 2019.09.23 13:09
  • 호수 13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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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소박한 사물과 사람들

며칠째 두 마리의 큰 벌이 방안을 나가지 않습니다. 유리창을 활짝 열어놓고 파리채를 휘휘 내두르며 내쫓아도 당최 나갈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기척이 없어 나간 듯하면 어디선가 다시 나타나 윙윙대며 날아다니니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게 며칠을 지내다 보니, 벌과 가족이 되었습니다. 말린 라벤더의 향을 맡고 들어왔나? 과일 몇 덩이를 냉장고에 넣지 않았더니, 한쪽 구석부터 상하기 시작하며 짙은 향을 뿜어내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 달콤한 향이 벌들을 불러들인 것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한가위 달만큼이나 탐스럽고 노르스름한 과일 ‘배’를 봅니다. 봄을 알리며 피던 하얀 배꽃이 황금빛 한 알의 배가 되어 가을과 함께 왔습니다. 봄밤에 흐드러지던 배꽃의 모습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찾아봅니다.
마당 모퉁이에서 자라 핀, 춤추는 백로와 나비에 빗대던 아름다운 배꽃은 예로부터 시와 노래로 많이 불렸습니다. ‘공중에 날릴 땐 떨어지는 눈 같고, 땅에 나부낄 땐 치닫는 물결 같은’ 배꽃이 비와 바람과 이슬의 힘으로 크고 단단한 과일이 되어 온 것입니다.
뭍 시인들의 감성을 자극한 꽃만큼이나 희고 단단한 열매살로, 향기와 단맛이 듬뿍 담긴 배는 시원함과 아삭거리는 식감을 제공합니다.

삼천년 전부터 재배해 온 배는 서양배와 중국배, 한국과 일본에서 재배하는 남방형 동양배로 나뉩니다. 품종에 따라 배나무가 자라는 온도는 다르지만, 내한성이 강한 품종은 영하38℃의 지역에서도 자란답니다.
저장성이 좋아 오래 보관할 수 있는 배는 예전에는 사과보다 비싸서 귀한 대접을 받았던 때도 있었으며, 고급(?)스런 금색으로 선물용 과일로 많이 쓰였습니다. 비타민과 섬유소가 풍부한 알칼리성식품으로, 특히 고기와 음식궁합이 좋아 육회에는 꼭 들어갑니다. 조선의 26대 왕 고종은 냉면을 즐겨 먹었는데, 수라간 상궁은 냉면육수를 만들기 위해 배를 듬뿍 넣은 물김치를 따로 담갔다고 전해지기도 합니다. 
     
‘배’하면 큰 모양새와 ‘석세포’가 먼저 떠오릅니다. 중학교 가정시험이면 빠지지 않고 나왔던 문제였지요. 석세포는 치석이나 음식물 찌꺼기를 청소하는 효과가 있어, 배를 먹고는 양치질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구강청결제’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90%가 수분으로 갈증 해소에 탁월하므로 숙취에도 좋으며, 아스파라긴산이 풍부해 원기를 빠르게 회복시킨답니다. 소화효소도 많아 간을 보호하는 효과도 있으며, 꿀맛 같은 배의 단맛은 목의 염증을 가라앉히기도 합니다. 기후환경만 바뀌면 재채기와 줄줄 나오는 콧물을 주체할 줄 모르는 저에게, 과일즙을 내리는 친구는 배를 자주 먹어보라고 권합니다.
 

▲ 배꽃

다섯 장의 흰 꽃잎과 여러 개의 연분홍 수술이 아름다운 배꽃 ‘이화’는 왕가의 귀한 상징으로, 고려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전통주의 이름에도 붙여졌습니다.
달고 부드러워서 ‘달보드레하다’는 ‘이화주’는, 배꽃이나 배로 담그는 전통주가 아니라 배꽃이 필 무렵 빚는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입니다.
배나무에 연둣빛 새싹이 나올 무렵에 멥쌀을 쑥으로 싸서 ‘이화곡’이라는 전용누룩을 만듭니다. 눈처럼 희고 고운 자태의 배꽃이 활짝 펴 달빛에 더 고즈넉하고 아름답게 절정에 달하면, 멥쌀가루로 백설기 등 떡을 만들어 집집마다 술을 빚습니다. 향긋한 꽃내음 대신 독특한 맛과 시원하고 달콤한 향을 지닌, 흰죽과 같은 떠먹는 막걸리를 만드는 것입니다.

배꽃이 필 때 빚어서 한여름 더위에 냉수나 얼음물에 풀어 들이키면 갈증이 말끔하게 씻긴다는 ‘이화주’는, 물이 사용되지 않는 것이 특징으로 알콜도수는 낮지만 유기산이 풍부하고 감칠맛이 뛰어납니다. 과거에는 노인들과 부녀자들도 즐겨마셨으며, 특히 젖을 뗀 어린아이들에겐 훌륭한 영양 간식이었답니다.
중국에서는 배나무이(梨)가 이별을 뜻하는 이(離)와 발음이 같아서 연인끼리는 먹지 않는 풍습도 있다고 하지만, 우리의 ‘이화’는 여러 곳에서 두루두루 고고한 이미지를 줍니다.

길가에 서 있는 키 작은 돌배나무를 봅니다. 녹갈색의 배에 흰점이 촘촘하게 박혀있습니다. 크고 미끈한 모양 대신, ‘석세포’가 가득 담긴 열매를 매달고 있습니다.
돌처럼 딱딱한 배가 달린다고 돌배나무, 아기처럼 작은 배가 달린다고 아그배나무, 팥알만한 배가 달린다고 팥배나무, 배의 크기와 모양에 따라 배나무의 이름도 다릅니다.

<김현락 지면평가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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