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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장의 민속자원과 그 숨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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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장의 민속자원과 그 숨결
  • 청양신문
  • 승인 1998.11.27 00:00
  • 호수 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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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양지방의 분청사기
조선왕조가 시작되면서 고려청자의 화사한 모습은 검소하고 소박한 시대적 기풍에 따라 일시에 그 자취를 감추고 분청사기와 백자가 발달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고려청자의 전통을 이어받아 나름대로의 변형을 겪어온 분청사기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16세기말까지 생산량이 오히려 백자를 앞지른 정도였으나 전란으로 인한 타격과 도공들의 일본 납치로 그 기술이 완전히 끊기게 되었다.
임진왜란을 통한 왜인들의 문화적 약탈은 전쟁으로 인한 물리적 파괴에 못지 않아서 여러 부분에 걸쳐 그 피해가 컸던 것이다.
세종 때에는 3백21곳이나 되던 전국의 도요지는 거의

다 파괴되어 분청사기의 전통이 끊기고 백자만이 명맥을 이어 이후 조선시대의 도자기는 백자 일색으로 고정되게 되었다.
우리고장 청양지방에는 분청사기 요업을 했던 곳이 곳곳에 있었으나 역시 전란으로 명맥이 끊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당시 분청사기 요업터는 정산면 천장리 소재 지금의 천장호 한복판이 공용 분청사기를 만들던 곳이었으나 수몰이 되었고 대치면 장곡리 마을에도 도요지가 남아있다.
그리고 청양읍 백천리 사기점골이 있다.
이렇듯 우리고장에는 이밖에도 곳곳에 그 유명했던 분청사기 요업이 많이 있었던 곳이다.
분청사기는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沙器)의 준말로 고려청자와 같은 회색 또는 회흙색 태토위에 백토로 표면을 바르고 그 위에 회청색계통의 유약을 발라 구운 사기를 말한다.
이 분청사기는 원래 고려시대 말기에 청자의 기법이 몰락하면서 생긴 질이 떨어지는 상감청자에서 출발했지만 그 후로 독자적인 그릇선의 아름다움과 활달한 무늬를 살려 도자기의 한 종류로 당당한 위치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유약도 청자 유약에서 출발해서 차차 회백색 혹은 백색 투명한 유약으로 바뀌었고 산화염이 아닌 환원염이나 중성염으로 굽게 되었다.
분청사기의 유약은 회흙색 태토의 색깔이 비쳐보여 대부분의 경우 표면이 회청색을 띄나 분청사기에 넣는 무늬는 상감문, 인화문, 박지문, 백토분장문, 철서문 등이 있다.
이중 철화무늬는 철분이 많이 섞인 회색 또는 흙갈색 태토의 그릇에 귀얄로 백토를 바르고 철분이 든 물감으로 당초, 연꽃, 모란, 물고기, 새, 버들, 삼엽무늬 등을 도식화하거나 회화적으로 재구성하여 운동감 있게 그린 것이다.
이때 굽 부분과 목 부분을 빼고 중심부분만 귀얄로 백토를 칠해 태토와 백토 색깔의 대조감을 살리는 것이 충청남도내 계룡산 일대와 청양지방 도요지의 특색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한편 그동안 청양지방의 도요지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수몰되고 손실되는 등 큰 아쉬움을 주고 있다.

안종일 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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