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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소박한 사물과 사람들…등나무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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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소박한 사물과 사람들…등나무벤치
  • 청양신문 기자
  • 승인 2019.05.20 11:51
  • 호수 129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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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랏빛 쉼터로 초대…등나무벤치

봄도 봄이지만/영산홍은 말고/진달래 벚꽃까지만/진달래꽃 진 자리/어린 잎 돋듯/거기까지만/아쉽기는 해도/더 짙어지기 전에/사랑도/거기까지만/섭섭기는 해도 나의 봄은/거기까지만 – 정희성, ‘연두’전문
 
아치형 정문에 연보랏빛 꽃송이들이 주렁주렁 달렸습니다. 소담스런 꽃줄기가 그네를 타는 것처럼 흔들흔들 합니다. 꽃향기도 더불어 흔들립니다.

‘등’이나 ‘참등’이라 부르기도 하는 실타래처럼 얽혀있는 넌출, 가장 대표적인 덩굴식물인 등나무입니다. 숲속에서 저절로 자라기도 하지만, 우리나라 전 지역에서 쉽게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추위나 공해에 강해 도시나무로 적합한 등나무는, 아파트나 학교, 공원이나 관공서 등에서 쉼터 역할을 도맡아 합니다. 철제울타리나 지붕의 얼개만 세우면 등나무는 그것들을 타고 올라가 잘 자라기 때문입니다.
줄기에서 나오는 가지가 덩굴로 뻗어 나가면서 자라는 나무는, 3~4년이면 근사한 모양의 시원하고 멋진 휴식공간을 만듭니다. 등줄기로부터 얼개 사이로 주렁주렁 꽃송이를 길게 늘어뜨리며, 연한 보랏빛으로 피는 꽃은 수줍은 듯하면서도 화사합니다.

여름에 뙤약볕을 막아 그늘을 만들기 위해 심는 나무이지만, 5월에는 무수히 돋아나는 초록빛 잎과 함께 연보랏빛이나 흰색의 꽃을 피웁니다. 꽃도 꽃이지만 꽃에서부터 풍기는 싱그러운 향기는 사람들의 눈과 코를 대번에 끌어들입니다. 오른쪽으로 감으면서 올라가는 굵어지는 원줄기 역시 꿈틀거리는 듯한 구불구불한 모습으로 볼거리를 제공하며, 보랏빛 쉼터에서 초록 쉼터로 변하며 많은 사람들을 맞이합니다. 
꽃 밑에 앉으면 윙윙대는 벌 소리와 은은한 향, 여린 듯 환한 꽃의 색깔이  사람의 얼굴까지 꽃처럼 화사하게 만듭니다.
 
등나무는 다른 나무를 휘어 감고 자라서 달갑지 않기도 하지만, 건조하고 척박한 땅을 기름지게 만들기도 합니다. 밝은 곳에서나 감고 의지할 것이 있으면 덩굴이 위로 높이 올라가지만, 어두운 숲속에서나 감고 오를 물체가 없으면 일직선으로 길게 사방으로 뻗어나갑니다. 그렇게 뻗다가 기댈 것을 만나면 그것을 감고 위로 솟구쳐 자라는 생존전략을 가지고 있습니다.    
 
잘 자란 등나무 줄기는 탄력도 있고 모양도 좋아 지팡이 재료로 사용돼, 옛날 옛적 궁궐에서는 신하들이 걷기에 불편한 임금을 위해 등나무 지팡이를 만들어 드렸답니다. 등나무섬유를 사용하여 종이를 만들기도 하였으며, 의자를 비롯한 생활용품으로 등나무가 많이 쓰였습니다. 중국에서는 등나무를 태우면 연기가 곧바로 하늘로 올라가 그 연기를 타고 신이 내려온다고 믿어 등나무 향을 많이 사용하였답니다.

경주에는 ‘용등’이라 부르는 천연기념물 등나무가 있습니다. 가로27미터 세로17미터나 되는 커다란 두 그루의 등나무가 팽나무에 엉켜 있습니다. 용의 모양이기도 하지만, 한 청년을 사모한 자매의 애달픈 전설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전쟁터에 나간 청년이 전사했다는 슬픈 소문을 듣고 자매가 얼싸안고 연못에 빠져 죽으니, 그 넋이 한 나무처럼 엉켜 자라 등나무가 되었습니다. 그 후 살아 돌아온 청년은 자매의 사연을 듣고 역시 연못에 몸을 던져 팽나무로 환생하였지요. 팽나무와 등나무가 서로 얼싸안은 듯 휘감으며 수 백 년을 자라왔다는 전설입니다. 이런 연유로 이 용등나무 잎을 베개 속에 넣으면 부부의 정이 좋아지고, 또한 사이가 벌어진 부부들은 잎을 삶아 먹으면 부부애가 되살아난다고 하여 용등나무를 찾는 사람들이 많다고 전해집니다.
 
편지 끝마다 늘 해맑은 미소를 잃지 말라고 써 보냈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활짝 핀 채로 싱그럽게 흔들리는 꽃송이들을 보니 해맑은 미소가 이런 것인가 생각합니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친구의 마음을 새삼 보랏빛 꽃 사이사이에서 보았습니다.
           
햇볕이 풍부하고 만물이 생장하는 계절, 연두가 점차 초록으로 변해갑니다. 
개구리소리가 밤하늘을 채우는 날, 등나무 보랏빛 꽃을 말려 베개를 만들고, 꽃을 따 ‘등화채’를 만들어 먹으며, 깊고 잔잔한 향에 취해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순간, 오래전의 추억이 되살아나는 신비로운 향기의 매력에 푹 빠지도록요.      

<김현락 지면평가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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