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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소박한 사물과 사람들…골목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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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소박한 사물과 사람들…골목길
  • 청양신문 기자
  • 승인 2019.04.01 16:16
  • 호수 129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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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 보고 생각하며…골목길

바람의 밥이 꽃향기라고, 밥을 든든히 먹은 바람이 새들을 힘차게 허공 속에 띄운다고, 새들의 싱싱한 노래 속에 꽃향기가 서 말은 들어있다고, 당신에게 새들의 노래를 보내니 굶지 말라고, 시인은 시로 말합니다.
꽃향기를 마신 바람을 맞습니다. 꽃향기를 듬뿍 마신 바람은 머리 위로, 놀이터 속으로, 골목 속으로 길게 날아가며 꽃향기를 토해 놓습니다.
바람의 밥이 꽃향기라면 골목의 밥은 햇살입니다. 떨어져 나간 유리창이나 모퉁이 모퉁이마다, 각 지고 깨진 담벽 사이로, 바람같이 길고 길게 들어옵니다. 햇살을 먹은 골목은 냉이와 개나리와 질경이를 키우고, 앞집과 옆집과 뒷집의 이야기 거리를 풀어줍니다.
   

상처가 군데군데 난 은행나무 골목을 걷습니다. 한때는 가장 번화가였던 곳, 이제는 더 큰 길에 치여서 골목이 되었습니다. 은행나무 밑쪽으로 양복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동창이 살던 집이었습니다. 양복점 밑의 중국집, 중학교 졸업식 날에 짜장면을 먹었습니다. 우성산쪽으로 올라가다보면 옛날 버스정류장이 있습니다.
기둥과 창문과 현관문 위의 차양이 써금써금하지만, 빛바랜 근사한 하늘색 문을 열고 누군가가 금방 나올 듯합니다. 
별모양의 유리창 속에는 무엇이 있을까 궁금하여 안을 들여다보는 긴머리의 사람이 있습니다. 버스를 기다리고, 마지막 버스를 놓칠까봐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던 곳입니다.
    

푸른 쪽문에 열쇠가 비스듬히 걸친 채 문이 살짝 열려 있습니다. 살그머니 문을 밀고 들어가 봅니다.  
퇴비증산운동이 한창이었던 때의 거리현수막이 걸려있고 은행나무골목을 고적대가 행진하는 사진이 유리창에 빛가리개로 붙어 있습니다. 이날 무슨 큰 행사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쪽은 표 팔던 곳, 이쪽은 대합실, 대합실 유리창으로 빛 고운 햇살이 들어옵니다. 하얀 칼라를 덧붙인 까만 남청색 교복의 여학생들과 경찰관모자를 쓴 남학생들도 두런두런 거립니다. 산골에서 장을 보러 나온 긴수염과 중절모의 어르신, 커다란 보따리를 한 두 개씩 들고 계신 허리 굽은 할머니들의 모습도 섞여 보입니다. 그랬던 자리, 떠들썩했던 자리에 햇볕만 그득합니다. 

옛날 등기소 옆, 유치원이기도 했던 교회 건물에 담쟁이 마른 덩굴이 길게 흰 벽을 둘러쌓습니다. 아치형 현관 앞에서 사진을 찍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다가 어느 해는 크리스마스날에 사탕을 받으러 오기도 했었지요.
골목 앞에 서면 다시 옛날 그 시절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짠! 하고 오래전의 친구가 나타날 듯도 합니다.
햇살만 가득한 골목길은 다소 고적하기는 하지만, 끌리는 것이 있습니다. 먼지 낀 유리창들이 그렇고, 담장 한쪽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덩굴이나, 아기자기한 꽃화분, 요즘처럼 봄꽃이 화사하게 골목에 쫙 퍼지는 곳은 늘 매력적입니다.
 

아이들이 사라진 골목길, 겨울이면 담벽에 기대 앉아 해바라기를 하고, 여름이면 담 그늘에 자리를 깔고 앉아 한 가족같이 어울렸던 동네 사람들이 사라졌습니다.
대신 작은 스치로폼 상자와 흙이 담긴 비료포대가 담 밑에 있습니다. 곧이어 그곳에서는 아이들 웃음소리대신 푸릇푸릇 상춧잎과 고춧잎이 나오겠지요.
소멸과 부재로 골목길만의 낭만이 사라졌다 해도 골목길을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것은, 단지 과거에 대한 추억이나 향수가 아니라 비좁고 초라했을지라도 그곳이 가장 자유롭고 솔직했던 곳이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새로 난 도로명 주소보다는 몇 구 몇 통 몇 반이 더 익숙한 골목길, 학교 갔다 집에 오면 당연하게 엄마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골목길도 그대로 있을 줄 알았던, 아직은 눈에 선한 그 길들이 소방도로로, 주차장으로 변해버렸습니다.
       
골목길에 매화가 피었습니다. 산수유도 담장을 노랗게 장식했습니다.
꽃이 피고 비단바람 불어오고, 하얀 날개를 지닌 새들이 무궁무진하게 날아 올 수 있도록, 골목은 오늘도 햇살을 가득 받아놓았습니다.
<김현락 지면평가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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