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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천와 강선여 선생 추모제향 봉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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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천와 강선여 선생 추모제향 봉행
  • 이관용 기자
  • 승인 2017.12.04 11:12
  • 호수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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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에서 공자상 가져온 조선중기 학자

조선시대 문신 강선여 선생(호 백천와)을 추모하는 제향이 지난달 29일 운곡면 광암리 수령동 백덕재에서 봉행됐다. 이날 제향에는 진주강씨 문현교대종회(회장 강성구) 후손 60여 명이 참석해 선생의 업적을 기렸다. 제향은 초헌관 강석동, 아헌관 강석남, 종헌관 강두희, 축관 강세구, 집례는 강갑석 씨가 맡았다.

강선여 선생은 조선 중기 1574년(선조 7년)에 태어나 32세에 사마시(생원, 진사)에 합격했고, 4년 후 대과에 급제해 승무원을 지냈다. 이후 평사를 거쳐 공조, 예조, 병조 등 3조 좌랑과 병조 정랑, 영천군수, 면천군수를 지내다 고향인 청양으로 내려왔다.
그는 1628년 명나라 희종 황제가 서거하자 조선의 조문사절(진향사 서장관)로 방문, 명나라 황제 예종으로부터 공자 화상(畵像)을 받아 돌아오게 된다. 이때 가져온 공자의 그림은 운곡면 광암리 강선여 선생의 사저에 있다가 후에 지역 유림들이 건립한 서원으로 이전됐으며, 189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청양향교 대성전으로 옮겨 모셨다. 현재는 대치면 장곡리에 있는 백제역사체험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이 공자 상은 국내 유일한 탁본으로 역사적 가치가 높아 지역 중요문화재로 보호받고 있다.
강선여 선생은 1647년(인조 25년) 74세로 세상을 떠났으나, 그의 강직한 성품과 효행은 당대 문인들 사이에서 칭송이 높았다. 그의 업적은 서거 후 13년 우암 송시열이 짓고, 동춘당 송준길이 쓰고, 문곡 김수항이 전액을 쓴 공적비에 잘 나타나 있다.

강성구 진주강씨 문현교대종회장은 “강선여 선조께서는 충효가 남달랐던 분으로 명나라에 조선사절로 가서도 재물 대신 공자의 화상(畵像)을 받아올 정도로 강직하셨다”고 말했다.
강 회장은 또 “그 분을 기리기 위한 공적비문을 조선시대 명필이 썼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연구자들의 탁본이 잦아 곳곳이 훼손된 점이 안타깝다”며 “비문을 보호하는 시설이 마련됐으면 한다”고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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