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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 얼기 전 김장 서두르는 ‘소설 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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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 얼기 전 김장 서두르는 ‘소설 절기’
  • 청양신문 기자
  • 승인 2016.11.22 11:30
  • 호수 117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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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사진첩

비가 눈이 되고,
서너 번 내린 무서리가 된서리가 되어 내리고,
된서리가 서너 번 내리고 나면 얼음이 어는 계절이 됩니다.
여름 한 철, 작고 단단하고 푸른 열매를 달고 있던 어린나무들이 열매와 잎을 떠나보냅니다. 이토록 많은 잎을 키우고 있었다니, 나무밑동에 수북하게 낙엽이 쌓여 있습니다.       
 
산짐승이 먹이를 찾아 밭으로 내려오기 시작하고, 까치와 텃새들이 유난히 설치는 계절, 첫눈이 내리는 입동과 대설 사이, 소설절기입니다. 
논의 가을걷이도 끝냈고 마늘도 다 심었습니다.
처마 밑에서는 주황색 곶감이, 지붕위에서는 오가리를 내 널어놓은 무와 호박이 햇빛에 고운 살을 말리고 있습니다. 막바지 목화도 다 땄습니다.
‘초순의 홑바지가 하순의 솜바지로’바뀐다’는 소설절기는, 날씨가 급히 낮아지기 때문에 소설 전에 김장을 비롯한 겨울채비를 하느라 분주합니다.
노란 열매가 달랑 한 알 붙어있는 모과나무 아래에서 두 모자분이 김장거리를 장만합니다.
푸른 잎 밑으로 연둣빛 머리가 보이고 하얀 몸통은 흙속에 숨겨 놓았습니다. 한 뿌리를 쑥 뽑아 올리자 흙냄새가 기분 좋게 퍼져 올라옵니다.
고만고만하니 생김새도 참한 알타리무가 뽑힌 채로 무더기무더기 쌓여 있습니다. 동그란 무는 동치미로, 자잘한 무는 우선 먼저 먹을 신건지로, 알타리무로는 총각김치를 담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묻은 흙을 털고 잎사귀를 잘라 동치미 감으로 다듬고, 아드님은 무를 담아 나르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많이 다듬느라 그러시냐 아드님이 두런대자, 둘째도 주고 누구도 주고 해야 하지 않느냐 어머님 또한 두런대십니다. 내년부터는 딱 먹을 것만 심는다고 아드님이 또 두런대자, 니가 심지 내가 심냐 마음대로 하라고 어머님도 두런대십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내년 역시 누이와 동생 것으로 더 많이 심을 것을 어머니는 알고 계시지만, 그래서 더 미안한 마음인데도 말이 곱게 나가지가 않습니다.
 
한편에 모아둔 무청은 시래기를 만들기 위해 볏짚으로 엮어 겨우내 말리겠지요.  
탱글탱글한 남은 무는 내년 봄까지 먹을 수 있도록 보관합니다. 지금은 저온창고에 많이 보관하지만, 예전에는 가마니에 넣어서 땅 속에 묻어 보관을 하였습니다.
한 겨울, 땅 속 가마니에서 무를 꺼내면 뽀얗게 싹이 돋은 무를 볼 수 있었습니다.   
 
빈 김장항아리를 닦아 물에 우린 후 말리면서 김장은 시작됩니다.
잘 다듬은 붉은 고추를 방앗간에 가서 빻아오고, 봄에 담근 멸치젓국을 받쳐냅니다. 건더기는 건더기대로 달여 받치고, 풀을 끓이기 위해 찹쌀 방아를 찧어 놓습니다.
눈물을 흘려가며 쪽파를 다듬고, 마늘을 까고, 톡 쏘는 얼청갓잎도 숭덩숭덩 썹니다. 
밤새 절인 배추를 새벽부터 닦아 물이 빠지게 비스듬히 쌓아놓습니다. 준비한 재료에 갖은 양념을 넣어 만든 배추소가 넓은 고무다라에 담긴 채 햇살이 비치는 마루에 놓입니다. 한 분 두 분 동네 아주머니들이 달라붙어 구성진 입담과 함께 김장을 합니다.
모내기 때와 벼바심 때와 마찬가지로 김장하는 날이 잔칫날이었던, 멋모르고 배추 속을 먹는 맛에 좋아라 했던 어린 날의 그 계절이 소설절기였음을 후에 알았습니다. 

머리 위까지 나지막하게 착 가라앉은 하늘에서 반가운 일이 생길 듯 전깃줄에 앉아 있던 까치가 후다닥 날면서 짖어댑니다. 금방이라도 첫눈이 올 듯합니다.     

빈들처럼 홀가분하게 비운 마음으로,
의젓하게 팔짱을 끼고 동구 밖을 향해 서 있을 때,
근친 오는 막내딸 동구에 들어서듯
눈썹 밑으로 홀연히 내려앉는 눈이 첫눈이다
- 목성균의 글 일부분

우리 모두에게
흰나비처럼 살포시 내려앉을 첫눈의 이미지는 무엇일까 궁금해지는,
첫눈 오는 계절입니다.

<김현락 재능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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