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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노래하는 특별한 새 ‘억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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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노래하는 특별한 새 ‘억새’
  • 청양신문 기자
  • 승인 2016.11.14 11:20
  • 호수 117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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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사진첩

‘그래도 가을 한 자락이 황혼 쪽에 남았다고 암술과 수술을 구별하기 어려운 억새꽃이 뺨 위의 멍 자국만 남은 내게 다가와 만발한 집착은 버려야 한다고 중얼거렸다’
- 마종기 ‘북해의 억새’ 부분

주왕산으로 속리산으로 단풍이 들듯이,
여기저기에서 단풍보다 진한 촛불이 번지고 있어도 자연은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오염된 환경 속에서도 나무는 나무대로 들판은 들판대로 늘 묵묵히 제가 해야 할 일을 위해 제 길을 가는 자연처럼, 대부분의 사람들 역시 어쩌지 못하는 현실이라 할지라도 자기에 맞게 웃고 떠들고 생활합니다. 

들로 나서면,
은빛 무리들이 바람에 출렁이는 눈부신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길옆이나 산등성이나 냇가에서 파란하늘을 향해 오르다 만 몸짓으로 바람에 쏠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줄기가 억세고 질기며 기가 살아있어 억새라 불리는 볏과의 이 길쭉한 다년생풀은, 비록 나무로 자라지는 못하지만 하얀 날개를 단 씨가 바람에 날려 흩어지며 번식을 합니다. 
 

깊은 가을이 되면 윗부분은 죽고 뿌리는 그대로 살아남습니다. 이듬해에 손가락 굵기의 뿌리줄기가 땅속에서 옆으로 벋어 더 많은 포기로 잎과 줄기를 키우며 산과 들에 골고루 퍼집니다.
바람이 센 산꼭대기의 분지나 뙈기밭 두둑, 길섶, 야산 아래쪽 등 나루터 모래언덕에서까지 잘 자랍니다.
억새의 자리처럼 당연한 듯이, 자생여건이 나쁜 버려진 자투리땅에 뿌리를 내리고 씩씩하면서도 모질게 자라 늦가을 썰렁하기 짝이 없는 들과 산 곳곳에서 하얗게 빛을 냅니다.  

구월이 되면 줄기 끝에 부채모양으로 흰색에 가까운 은빛 꽃이 모여 달리며 피기 시작하여, 시월 말쯤이면 절정을 이룹니다.
가늘고 끝이 뾰족한 작은 이삭들은 황백색의 털로 한 장 한 장의 꽃을 보호합니다.    
바람에 표표히 흔들리는 억새꽃은 여한 없는 한 생애의 마지막 빛남처럼,   어디서부터 어떻게 무엇으로 인한 시작인지 알 수 없는 슬픈 모습이지만, 맑고 짙푸른 하늘 밑 모든 꽃이 진 들판을 무더기무더기 은빛으로 피워 놓았습니다.  
이리저리 바람에 쏠리는 모습은 금방이라도 꺾일 것 같은 가냘픔을 보이지만, 질기고 부드러운 줄기는 쉽게 부러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멋모르고 융단 같아 보이는 꽃과 잎을 만졌다가는, 길쭉한 잎 가장자리에 있는 날카로운 톱니로 손을 베기 쉽습니다.

한바탕 바람이라도 스쳐 갈 때면,
억새의 잎사귀들은 더욱더 사각대고 꽃술은 한 순간도 멈출 줄 모릅니다.
억새밭 안에서는 끌어들인 햇살까지도 바람이 되어,
눈을 감고 귀를 기울여보면 소소소 귓불을 스치는 맑은 향기 같은 소리가 들립니다. 
 

벽천리 녹색길을 걸으며,
억새가 나부끼며 물결을 만드는 풍경을 봅니다.     
약간 기울어진 은빛 이삭들은 늪 바닥에서 자라는 갈대와 함께 있어 한층 돋보입니다.   
지난해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줄기들과 새로운 무더기를 이룬 억새들이 몸과 몸을 섞어, 바람도 달빛도 아닌 제 조용한 울음으로 출렁거리고 있습니다.
홀로는 홀로인 채로,
함께 한 것들은 또 그 무리대로, 슬픔과 즐거움과 벅참과 소소로움을 한 몸 가득 채워 흔들고 있습니다.
누구나 제가 살아가는 대로 생각을 하며 말을 하듯이, 가슴을 움직이게 하는 모습, 숨어 있는 슬픔을 불러일으키는 모습, 때때로 숨죽이고 있었던 외침을 끄집어내는 모습도 다르다는 걸 보여줍니다.      

아직 조금씩 남아 있는 푸름과 어우러진 붉음이, 노랑이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차가운 가을밤,
달빛 아래나 가로등불 밑에서 반쯤 고개를 숙인 채 사각대는 억새는
모든 소리가 음악이 될 수 있듯이
모든 움직임도 춤이 될 수 있음을 몸으로 보여줍니다. 

<김현락 재능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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