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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절구와 맷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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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절구와 맷돌
  • 청양신문 기자
  • 승인 2016.08.22 14:26
  • 호수 1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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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영/ 서울시 금천구(장평면 적곡리 출신)

확독과 맷돌은 내 고향의 특산품이었다. 칠갑산 동남쪽 자락에 위치한 장평면 적곡리, 동서남북 산의 병풍 속에 논밭은 많지 않아도 북실, 삼경재, 돌말, 소사천 등 4개 마을은 이웃 간에 작은 것도 나누는 정으로 살아왔다.
적곡리 이곳저곳에는 참 돌들이 많았다. 특히 동네 앞 안산에 돌이 많아 그 안 마을을 돌말(돌마을, 석촌)이라 불렀다. 1950~60년대 많지 않은 추수를 끝내고 나면 마을에서는 뚝딱 뚝딱 돌 다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농한기 어른들의 돌(石) 일이 시작되었다는 신호였다. 그 시절 돌 작업 하시는 분들을 석수장이(석공)이라 불렀는데 북실, 삼경재, 돌말에 10여 분 정도 있었던 걸로 기억난다.

적곡리 4개 마을의 논밭이 그리 넓지 않아 소득이 적다보니 석수장이 일이라도 해야 자녀들 학비나 옷가지 장만, 부족한 식량을 보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어린 나이에 앞을 가로막은 안산을 바라보며 “이 산이 들판이었다면 마을 사람들이 부자로 살 텐데” 하는 생각을 했었다.

석수장이들의 주된 생산품목은 돌절구(확독)였다. 아무 돌로나 다 만든 것은 아니고 산이나 밭에 박혀 있는 화강암을 골라 만들었다. 석수장이들은 화강암을 구해 돌절구 외에도 맷돌, 다듬잇돌, 소 여물통 등을 만들었다.
그 시절의 돌 작업은 요즘처럼 기계나 전기로 하는 것이 아니고 순전히 수작업으로 진행되었다. 큰 돌의 결을 살핀 뒤 먹줄로 금을 긋고, 정을 이용해 중간 중간 구멍을 파고 쐐기를 박았다. 돌 틈으로 스며들 수 있게 물을 붓고 큰 해머로 내리쳐 금이 가면 그곳에 강철 지렛대를 박아 돌을 쪼갰다. 그 후에 여러 날을 다듬으며 뭉건을 만들었다.

소달구지도 없던 시절 미당장날이면 그 무거운 것들을 지게에 지고 가서 팔았다. 몇 번을 쉬어가며 미당장 다리목에 갖다 놓으면 쇠전, 싸전, 포목전, 어물전과 함께 시장 풍경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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