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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기고: 외할머니 댁(이상학, 복주미의 결혼 축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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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기고: 외할머니 댁(이상학, 복주미의 결혼 축시)
  • 청양신문 기자
  • 승인 2014.04.14 16:56
  • 호수 10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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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용 시인/용인대 교수

타래박 우물가 큰 은행나무 옆
퇴비장의 높이가 뻐꿍산과 어깨를 겨루며
하늘 향해 차곡차곡 쌓이다가 거름이 되어
논다랭이와 밭고랑으로 뿌려지고
알토랑 같은 금전옥답 일구며 살던
외할머니 댁

궁상각치우 그려놓고 퉁소불고 장구 치던 사랑방엔
짚벼개를 베고 시조를 읊으시다가
정월대보름이면 어김없이 말미 감망골 풍장꾼들의 상쇠(上釗)가 되어
청아한 꽹과리 소리를 집집마다 풀어놓으며
만복을 빌어주던 외삼춘의 잔잔한 리듬가락이 살아 있는 곳

풍구(風具)바람 하늘거리며 나부끼던 가을바람이
이삭 줍던 누나들의 치마단을 옹쳐매게 하고
뭉개구름 들녂을 온통 누렇게 칠해놓고
갱변 버드나무가지마저 낭창거리게 흔들면
풀섶 여치들 셨장대며, 메뚜기떼 구리안 황금들판에서 통통하게 살쪄가고
볏섬 가득 누런 낱알이 차곡차곡 쌓일 때 쯤
가을걷이 끝난 들판엔 때까치 까맣게 모여들고
이내 금방 건사골 산기슭에는 하얀 눈 위에 꿩 발자국 단풍처럼 찍히고
파릇파릇한 보릿잎이 뾰족이 고개를 내밀면
동네 아이들의 겨울이 시작 되었던 곳

방학이 끝날 무렵
감나무가 장승처럼 서 있는 툇마루 오줌장군 옆으로 불러내어
소꼬쟁이에서 꼬깃꼬깃 접어두었던 지전을 손에 쥐어 주시며
“이번이 마지막이여, 서울 가면 에미 말 잘 듣구, 휴우….”
그 후로도 외할머니의 목이 멘, 마지막은 계속되었고
내 아들 돌 때에도 오셔서, 돌상에 지폐를 올려놓으셨지
손작두로 썬 골연초(담뱃잎)를 미군 미루꾸 깡통에 담아 놓고
장죽 곰방대에 꾹꾹 눌러
화롯불에서 불씨를 살려 주시장창 피우시다
다 태우시면 “땅 땅” 놋쇠 재떨이에 재를 터는 소리에
우리 손자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달려들어
호롱불 켜고 꼬챙이로 담뱃진 빼는 재미에 하루가 저물었던 곳
99세까지 한 번도 흐트러짐 없이 사시며
손에는 늘상 호미를 쥐고 가문을 일으키셨던
내 마음의 고향
우리 외할머니

오늘도 휘어질 대로 휘어진 감나무 가지에는
외할머니의 외줄기 사랑이 홍시 되어 걸려있고
살강 안 지랑종지 옆에는 짭짤한 짠지와 백김치가 미각을 돋우고
대문 옆 외양간 앞에서
작두로 여물 써는 소리를 들으며
에미소가 침 흘리며 물끄러미 서서
젖 달라고 보채는 송아지의 울음을 지켜보고 있던 곳

할미꽃, 까치밥, 삘기, 시엉이 지천으로 핀 곤짓들에
까투리가 새끼들을 데리고 봄나들이 나서면
앞산 뻐꾸기, 뒷산 꾀꼬리 들이 청아한 고음으로 화답하고
화들짝 놀란 종달새는 보리밭위로 아지랭이를 헤치고 날아올라
사방의 파수꾼이 되어 호들갑을 떨던 곳

연봉쟁이 시퍼런 금점구뎅이 물위에
깨구락지 참외, 오이, 수박을 띄워 놓고
눈알이 벌겋토록 멱을 감다가, 주먹으로 탁 탁 깨쳐서 조각조각 나누어 먹던
동네아이들의 달콤한 추억이 단물처럼 뚝뚝 흐르는 곳
세월이 가고
인생이 가고
시절이 백건곤 하여도
내 어찌 그곳을, 그곳을, 잊으리이까
꿈엔들 잊으리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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