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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청양의 항일독립운동가 - 낙계 김덕진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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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청양의 항일독립운동가 - 낙계 김덕진 선생
  • 프리랜서 정재봉
  • 승인 2012.05.14 10:39
  • 호수 9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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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위해 원수를 갚는 것은 동포의 몫”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독전어사로 활약했으며 세자시강원의 벼슬을 지냈던 김중일의 9세 손으로 태어난 김덕진 선생. 그의 자는 경명이고 호는 낙계이며 본관은 안동이다.
김덕진 선생은 고종 2년(1865년) 청양군 장평면 낙지리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어렸을 때부터 불의를 그대로 지나치지 않고 반드시 정의의 편에 서는 성품이었다고 한다. 일화로 병자년(1876년)에 일본이 우리에게 조약을 강하게 요구하기 위해 왜장 흑전청륭으로 하여금 몇 척의 군함을 이끌고 위협하니 나라가 몹시 시끄러웠다. 이때 선생의 나이 12세. 하루는 앞마당에 동네 아이들을 모아놓고 땅에다 감옥을 그리고 종이에 사람 얼굴을 그려 아이들에게 주면서 “이놈을 결박해 옥에 가두어라”, “당장 이놈의 목을 베어라” 하고 소리치니 이 일굴의 주인공이 바로 왜장 흑전이었다. 이를 본 모든 이들이 어린 선생의 기개에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을미년(1895년)에 왜적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그해 겨울 전국에 단발령이 내려지자, 선생은 통분을 참지 못하고 홍주성에서 규당 안병찬과 지산 김복한 등과 함께 창의토왜(倡義討倭)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선생의 나이 40세가 되던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선생은 당시 정산면 천장리에서 때를 기다리고 있던 전 참판 민종식을 찾아가 정재호, 이세영, 박윤식, 이용규, 이상두 등 여러 애국동지들과 뜻을 같이했다. 마침내 고종 43년(1906년) 홍주성을 공격, 탈환하고 의병이 집결하게 되니 그 사기가 크게 올랐다. 그러나 서울에서 왜군 보병과 기마병 그리고 기관포, 헌병 1개 중대가 홍주성에 쳐 들어오게 되었고 잘 훈련받은 군인과 신식무기에 의병들은 오직 죽기로 싸울 뿐 모든 면에서 역부족이었다. 이 전투에서 300여 명의 의병들이 장렬히 전사했고 70여 명이 일본 헌병에 체포됐다.

선생은 민종식 등과 함께 예산군 대술면 수당 이남규의 집에 숨어 다시 기회를 살피던 중 충청도 관찰사 김가진에게 발각됐고, 민종식을 비롯한 1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일본 헌병들에게 잡히고 말았다.
선생은 일본 경찰로부터 취조를 받게 되는데 두 사람의 문답을 통해 선생의 뜨거운 절개와 용기를 엿 볼 수 있다.

▲ 김덕진 선생의 필적

‘일본 경찰이 묻기를 “너의 나라에 대해 일본이 보호해 준 공이 자못 큰데 어찌 우리를 원수로 삼아 항거하려고 하는가?” 하니 선생이 답하기를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너희 나라의 침입을 받지 아니한 때가 없고 특히 임진왜란에는 우리 임금의 능을 파헤치고 을미년에 국모를 시해한 원수다. 또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한 일은 아직도 그 울분을 참지 못하겠거늘 나라를 위해 원수를 갚는 것은 우리 동포가 모두 같으니 어찌 권유로 한 것이겠는가!” 일본경찰이 다시 묻기를 “너희들은 우리 보고 오랑캐라고 하고 또 애비도 없고 임금도 없는 놈들이라 하는데 무슨 까닭인가?” 이에 선생은 “이토오 히로부미는 자기나라 임금까지 해친 일이 있음으로 마땅히 처형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공신이라 부르고 있으니 어찌 애비가 있고 임금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너희는 본디 남녀의 구별이 없고 머리를 풀 베듯 하니 오랑캐라는 말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일본경찰이 또 다시 묻기를 “이제 석방하면 다시 일을 꾸미겠는가?” 하자 선생은 “이 일만은 내가 죽은 뒤에나 끝날 것이니 다시 물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취조하던 일본 경찰이 침묵 속에 잠겼다가 선생의 결의에 찬탄하고 그 뒤로는 항상 선생을 높여 지사라고 불렀다.
그 후 선생은 민종식 등과 함께 종신형을 받고 지도(현재의 전남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고종 황제의 특명으로 석방되었다.

선생은 왜경의 감시와 온갖 협박에도 기미년(1919)에 미국 대통령 웰슨이 불란서 파리에서 만국평화회의를 개최할 당시 유림 대표들과 함께 왜적의 침탈과 국권상실을 세계만방에 호소하는 장서를 올리기도 했다. 바로 ‘파리장서사건’이다. 이 일로 다시 대구옥에서 공주옥으로 옮겨져 모진 악형과 곤욕을 치렀다. 그 후 방면되기는 했으나 가혹한 옥살이의 후유증으로 정해년(1947) 2월 15일 운명했다.

낙계 김덕진 선생의 묘는 장평면 낙지리 선영에 있으며, 1977년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됐고 1984년 묘역을 정화하고 비문을 세웠다. 또 현재 장평면사무소 정문 옆에는 선생의 기적비가 있다.

<자료제공 : 국가보훈처, 참고문헌 : 홍주의병실록>
 정리=프리랜서 정재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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