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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벚나무와 연분홍빛이 출렁이는 구봉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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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벚나무와 연분홍빛이 출렁이는 구봉산
  • 프리랜서 김현락
  • 승인 2012.05.07 10:51
  • 호수 9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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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따라 찾아가는 ‘산’
봄날 나무 아래 벗어둔 신발 속에 꽃잎이 쌓였다.// 쌓인 꽃잎 속에서 꽃 먹은 어린 여자아이가 걸어나오고, 머리에 하얀 명주수건 두른 젊은 어머니가 걸어나오고, 허리 꼬부장한 할머니가 지팡이도 없이 걸어나왔다.// 봄날 꽃나무에 기댄 파란 하늘이 소금쟁이 지나간 자리처럼 파문지고 있었다. 채울수록 가득 비는 꽃 지는 나무 아래의 허공. 손가락으로 울컥거리는 목을 누르며, 나는 한 우주가 가만가만 숨 쉬는 것을 바라보았다.// 가장 아름다이 자기를 버려 시간과 공간을 얻는 꽃들의 길.// 차마 벗어둔 신발 신을 수 없었다.// 천년을 걸어가는 꽃잎도 있었다. 나도 가만가만 천년을 걸어가는 사랑이 되고 싶었다. 한 우주가 되고 싶었다.

봄날 나무 아래 벗어둔 신발 속에 꽃잎이 쌓였다.// 쌓인 꽃잎 속에서 꽃 먹은 어린 여자아이가 걸어나오고, 머리에 하얀 명주수건 두른 젊은 어머니가 걸어나오고, 허리 꼬부장한 할머니가 지팡이도 없이 걸어나왔다.// 봄날 꽃나무에 기댄 파란 하늘이 소금쟁이 지나간 자리처럼 파문지고 있었다. 채울수록 가득 비는 꽃 지는 나무 아래의 허공. 손가락으로 울컥거리는 목을 누르며, 나는 한 우주가 가만가만 숨 쉬는 것을 바라보았다.// 가장 아름다이 자기를 버려 시간과 공간을 얻는 꽃들의 길.// 차마 벗어둔 신발 신을 수 없었다.// 천년을 걸어가는 꽃잎도 있었다. 나도 가만가만 천년을 걸어가는 사랑이 되고 싶었다. 한 우주가 되고 싶었다.
-배한봉 ‘복사꽃 아래 천년’ 전문

방방곡곡이 싱그럽고 화사한 연초록빛으로 물들어 최고의 경치를 내뿜고 있다. 남양면, 효자가 많이 난 산수골을 지나 신왕리 골짜기에 숨어있는 산을 오른다. 숲 속 여기저기 산벚나무 꽃이 환하게 피었다. 큰 꽃 한 송이씩 들어앉아 있는 것 같은, 9개의 봉우리가 있어 구봉산이라 불리는 산을, 이리 오를까 저리로 오를까 하다가, 돌담 사이사이 영산홍으로 범벅이 된 숭의수련원 뒤쪽의 잘 손질된 오솔길을 택했다. 

▲ 사진2
미끈미끈한 소나무들과 어우러진 연둣빛 어린잎들은 바라만 보아도 마음 저 밑바닥에 깔린 묵은 때까지 승화될 듯 상큼하다.(사진1) 소나무에 기대어 자라고 있는 작은 철쭉과, 솔가리를 헤치고 나온 산딸기, 갓난아기 손만한 담쟁이 잎이 반짝이며 붙어있는 바윗돌을 떠들고 빼쪽 삐친 둥굴레, 누군가에게 발견되지 않아 꽃 피운 고사리가 다정다감하게 어우러져 있다. 뿌지직 나무들 기지개 켜는 소리가 끊어질 듯 이어지고 있다. 보랏빛 산제비꽃이 반짝 눈에 띄어 다가갔더니, 나 보다 더 놀란 뱀 한 마리가 가는 꼬리를 보이며 정신없이 숲 속으로 들어간다.     

근원을 알지 못하는 곳으로부터 계곡을 적실만큼씩의 물이 스민다. 축축하게 젖은 나뭇잎 위로, 자잘한 돌 위로, 새끼손톱만한 분홍빛 꽃잎 위로, 새로운 꽃잎이 내려앉는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피어난 꽃들이, 먼저 왔으니 그 또한 먼저 가는가, 한잎 두잎 떨어진 꽃길을 걷는다.
무성한 푸나무 사이에, 씨앗 껍질을 머리에 이고 나온 고비가 마치 사람을 부르는 음표처럼 예쁘다.(사진2) 주렴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듯한 상수리꽃, 여름이 되면 빨갛게 익을 망개의 열매가 아침 이슬처럼 맺혀있다.(사진3) 

▲ 사진3

정상을 750미터 남겨둔 지점에 있는 쉼터에 앉아, 골짜기와 골짜기 사이에서 파도치며 올라오는 연초록 바람을 품안에 담는다.
몇 개의 봉우리들이 둥그런 모양을 만들며 보이기 시작한다. 듬성듬성, 큰 꽃송이처럼 보였던 산벚나무꽃이 화사하게 펄럭인다.(사진4) 정상에 가까울수록 어린 엄나무가 무더기무더기 떼를 지어 자라고 있고, 개죽나무 새순이 꽃처럼 벌어지고 있다. 아름다운 경치란 것이 따로 있지 않듯이, 나무의 새순 하나하나가, 제철 제빛으로 태어나는 모양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가 없다. 심지어, 마른나무 가지 틈에 동글동글 매달린 벌레집들까지도.

넘어지고 뽑혀진 나무사이로 보라색 꽃 몇 송이가 산길을 조심스럽게 걷게 한다. 흔히 가을에 핀다고 한 수리취꽃이다. 두 무릎을 꺾고 머리를 숙여야만 봉오리진 모습이 겨우 보인다.        
전망대에 올라 진달래꽃 사이로 한 줄기 꼬부랑길을 내려 본다. 누구나 가야 할 길, 또는 이미 지나온 길이지만 아래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이다. 뭉게뭉게 산기슭을 타고 오르는 연초록 기운에 흠뻑 젖은 마음을, 죽은 소나무등걸에 붙어 자란 단추 같은 버섯에 잠시 내려놓는다.

산자락 초입에, 햇살 비추는 쪽으로 노란 민들레가 수줍게 얼굴을 내밀었다. 새로 피는 꽃이 눈에 잘 뜨이는 법이지만, 자세히 보면 그 환함 속에 숨어있는 혼자만의 비밀스런 이별이 보인다. 어느새 지는 꽃이 홀씨를 품고 바람을 기다린다. 나고 죽음이 한 몸이고, 탄생과 소멸이 한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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