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4 15:03 (수)
<기획> 청양의 항일독립운동가 - 정산 남천리 이식 선생
상태바
<기획> 청양의 항일독립운동가 - 정산 남천리 이식 선생
  • 프리랜서 정재봉
  • 승인 2012.05.07 09:37
  • 호수 9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어서 나를 죽이고 더 욕보이지 말라”
▲ 1907년 4월 14일(음력) 이식이 대마도에서 고향인 정산면 남천리(당시는 정산군 대면 성주동) 본가에 보낸 편지. 누이가 직접 읽을 수 있도록 따로 한글로 쓴 것이 특이하다.

이식은 1873년(고종 10년) 1월 3일에 정산면 남천리 승지동에서 이조원의 자제로 태어났다. 자는 유상이며 호는 화산 또는 신구당이다. 본관은 연안으로 사우당 시담의 9대손이다. 일찍이 면암 최익현 선생에게 사사하였으며 학덕과 충의를 함께 지녔다.

1905년 국내에서 김동필 등 26명이 13도에 유약소를 조직했는데, 이때 이식도 그 일원이 되어 활약하며 20여 차례나 일본의 침략적 죄상을 폭로했다.
그 중 을사늑약 체결에 대해 이등박문에게 직접 글을 보냈다. 그는 이 글에서 일본이 과거의 신의를 저버리고 침략과 약탈을 일삼는다며 조목조목 크게 꾸짖었다.

이식은 또 같은 해 9월 조선 백성이 일치단결해 국난을 극복하자는 포고문을 만들어 전국에 돌렸으며, 11월에는 일제에 대항할 의거 계획을 세우다가 일본 헌병에게 잡혀 서울 경무청에 구금됐다가 이듬해(1906년) 3월 풀려났다.

그해 4월 민종식 등이 홍주에서 의병을 일으킬 때 참모사로서 홍주성을 점령했으나 다시 적에게 함락될 때 체포됐다. 홍주의병 가담자 80여 명은 서울로 끌려가 일본군 사령부에 구금됐다가 6월 초 70여 명이 풀려났다. 하지만 이식은 무기형을 선고받고 일본 대마도로 유배됐다.

이식은 6월 18일 서울을 떠나 19일 대마도에 도착, 기약 없는 유배생활을 시작했다. 23일부터는 조선을 향해 배례를 올리며 원수를 갚지 못한 채 남의 땅에 갇힌 일을 한탄했다. 그는 고국에 돌아가면 또다시 싸울 것을 맹세하며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대마도라 일본 땅 서울과는 머언 곳/갇혀 있는 우리들 퍽이나 슬프구나./나라걱정 날로 더해 더러는 눈물짓고/집안 생각 간절해 항시 애만 타누나.//내개는 단 음식도 쓰기만 하고/산이 저리 좋아도 한숨이 절로 나네./죽고 삶은 명이라 인력으로 당할 손가/만 리가 멀다 한들 일편단심 변하랴.’

7월 9일 순창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최익현과 임병찬이 대마도에 잡혀왔다. 면암 최익현 선생은 이식의 은사였다. 이때 경비대 대장이 중대장을 데리고 와서 갓을 벗으라고 협박했다. 그러나 이에 따르지 않자 강제로 갓을 벗기었다.

그러자 이식은 그들을 향해 “너희가 우리 보고 이미 일본 밥을 먹었으니 마땅히 일본 제도를 따라야 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네 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와 있을 때 이미 한국 음식을 먹고도 어찌하여 우리나라 옷을 안 입고 상투를 안 틀고 갓을 쓰지 않았느냐? 너희들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서 유독 우리에게만 네 나라 제도를 따르라고 하느냐? 머리를 존중히 여기어 잠시라도 갓을 벗지 않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이 선왕과 선성에게서 받은 큰 철칙이다. 그러므로 갓을 벗고 머리를 깎는다는 것은 그분들에게 죄를 짓는 것이다. 차라리 일본 밥을 먹지 않고 죽을지언정 어찌 구차하게 그 명령을 따른단 말이냐? 어서 우리를 죽이고 더 이상 욕을 보이지 마라”며 꾸짖었다.

1909년 2월 몇 번의 감형 끝에 이식은 조국으로 돌아왔다. 고향을 떠난 지 3년 만에 집에 돌아와 어머니를 뵈었다. 영어생활로 병들고 지친 몸을 쉴 사이도 없이 그는 조국을 위해 몸부림쳤으나, 이듬해 한일합방이란 이름으로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다.

이식은 이를 너무도 원통히 여기며 일본의 잔악상과 죄상을 적어 각국 영사관에 보내 알리는 등 일본을 규탄했다. 1912년 독립의금부 사건이 일어나자 고종은 이식에게 ‘가선대부 삼남 지휘사’란 칙명을 내렸다.
이식이 신명을 다하여 임무를 수행하고 다음 해에는 서울로 올라와 거사를 준비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또다시 옥고를 치렀다.

나라 잃은 슬픔과 일제의 감시가 날로 더해지자 이식은 전국을 방황하다 1936년 64세를 일기로 경기도 용인군 남의 집에서 일생을 마쳤다. 그를 따르던 후진들이 정산면 남천리 고향 뒷산에 장례를 치렀고, 조국이 광복되자 유림에서는 그의 묘에 표석을 세웠다.

그리고 1977년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됐다. 1985년 충남도와 청양군이 묘소를 부근의 남쪽 양지 바른 곳에 이장한 뒤 묘역을 정화하고 그의 충혼을 기렸다.
한편 이식의 부인 함양박씨는 남편을 따라서 자결해 충신가의 열녀로 칭송을 받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