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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양의 항일독립운동가 임승주·임한주·임경호·임긍호 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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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양의 항일독립운동가 임승주·임한주·임경호·임긍호 지사
  • 정리=프리랜서 정재봉
  • 승인 2012.04.24 09:14
  • 호수 94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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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포상 애국지사 8명 배출한 물안이마을
아직 공훈대상이 되지는 않았으나 3·1운동 때 앞장서 항일투쟁을 벌이다 일제 헌병에 붙들려 태형을 당한 김만식, 안두종, 윤상진, 하래선 선생 등도 물안이 출신 애국지사다. 작은 마을에서 만대를 거쳐 기릴만한 애국지사를 열두 분이나 배출한 것은 전국에서 찾아보기 드문 일이다.
조국의 광복을 위해 고귀한 희생을 치른 물안이마을 애국지사들의 숭고한 정신을 찾아가 본다.

화성면 수정리 물안이는 애국지사의 마을이다. 물안이는 일제침략이 시작된 1895년부터 굴욕적인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을 비롯해 1919년 3·1만세운동을 거쳐 1945년 해방이 되기까지 구국활동을 벌인 지사들이 끊이지 않고 배출된 곳이다. 특히 물안이마을의 애국지사들은 국내는 물론 상해 임시정부, 간도 신흥무관학교 등 해외에서의 독립운동에도 적극 가담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공훈장을 통해 물안이 애국지사들의 숭고한 구국정신을 기렸다. 임한주·임경호 선생에게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임승주·임긍호 선생에게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또 건국포장을 받은 임상덕 선생, 대통령표창을 받은 임한영·임준호·김용옥 선생 등 여덟 명이 정부포상을 받았다.

아직 공훈대상이 되지는 않았으나 3·1운동 때 앞장서 항일투쟁을 벌이다 일제 헌병에 붙들려 태형을 당한 김만식, 안두종, 윤상진, 하래선 선생 등도 물안이 출신 애국지사다. 작은 마을에서 만대를 거쳐 기릴만한 애국지사를 열두 분이나 배출한 것은 전국에서 찾아보기 드문 일이다.
조국의 광복을 위해 고귀한 희생을 치른 물안이마을 애국지사들의 숭고한 정신을 찾아가 본다.

건국훈장 애족장 임승주 선생
985년 명성황후가 일본에 의해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려지며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된다. 김복한, 안병찬이 상소하고 격문을 각 지방에 전달하여 유림과 민중을 봉기시키고 홍주목사를 창의대장으로 추대하고 임승주 선생은 12월 3일 관하 17개 군에 통문을 보내 의병을 소집한다. 안병찬, 채광묵 선생과 180여명의 의병을 인솔해 홍주성에 무혈입성하고 성내에서 김복한, 이상린, 홍건, 안병찬, 안병임 선생과 함께 1000여명의 의병이 봉기한다.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한 뒤 전국에서 최초로 봉기한 의병의거였다. 의병 소집을 위해 홍주성을 비운 사이 마지못해 동참했던 홍주부 관찰사 이승우가 배신하여 김복한, 이설 두 장령을 비롯해 공과 함께 지휘한 주모자 23명이 체포·구금돼 일차 홍주의거는 실패한다.
고종황제는 임승주 선생을 비롯해 6인을 ‘홍주칠의사’라고 칙령했다. 또 십년 뒤인 1905년 봉기한 2차 홍주의거에서 900여 명의 의병이 전사하여 묻히니 이를 ‘구백의총’이라 한다. 임승주 선생은 조국광복의 기쁨을 누리지 못한 채 1939년 2월 73세를 일기로 서거한다. 정부는 공의 항일의거와 애국애족정신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건국훈장 애국장 임한주 선생
임한주 선생은 임승주 선생의 아우이며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걸쳐 항일투쟁을 벌인 독립운동가다. 홍주의병을 다시 구성해 홍주성을 점령하였는데, 이 때 홍양기사를 써 당시 의병활동을 기록했다.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자 파리장서사건에 참여했다.
임한주 선생은 1871년 2월 22일 태어났다. 1895년 일제의 만행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민족정신 고양과 국권회복을 위해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심했다.

김복한·이설·안창식·안병찬·이근주 등과 뜻을 모은 뒤 홍주부 관찰사 이승우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1896년 1월 13일부터 15일까지 이세영·이봉학·송병직·이상린 등이 군사를 이끌고 홍주성으로 입성하자, 거사를 미루던 이승우는 자신을 홍주목사 겸 창의대장으로 칭하고 주변지역에 격문을 보내는 일에 나섰다.
17일 김복한을 주장으로 하는 홍주의병대를 구성한 뒤 대부분의 인사들이 떠나자, 이승우가 돌연 마음을 바꿔 성에 머물던 김복한과 이설 등 관련 인물을 잡아들여 경성으로 압송, 의병대는 무산되고 만다.

1905년 강제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임한주를 비롯한 의병들은 홍주의병대를 다시 구성하여 홍주성을 점령한다. 민종식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여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전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패배한다. 이때 임한주는 홍주의병사 연구 사료인 홍양기사를 써 당시 의병활동을 기록했다.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자 동리 청년들의 궐기를 독려했다. 또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서(파리장서)를 초안하고 거창 유림의 대표인 곽종석 선생이 작성, 김복한 선생을 비롯해 전국유림대표 137인이 서명토록 주도했다.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기 김창숙 선생과 함께 조카 임경호를 특사로 상해 임시정부에 파견했다. 이 일로 5월 에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7월 29일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임한주 선생은 1983년 건국포장을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건국훈장 애국장 임경호 선생
임경호 선생은 애국지사 이시형(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이회영 형제의 중국 망명을 수행했으며 신흥무관학교, 경학사, 무정부주의연맹에서 활약했다. 1919년 전국 유림대표 137인이 연명한 독립청원서(파리장서)를 파리강화회의에 보내기 위해 특사로 임명되어 상해 임시정부의 김창숙 선생과 동행했다. 1922년 조만식 선생을 중심으로 조직된 조선물산장려회 창립 전국강연대표로 활약했다.

1925년 이상호 선생과 규합해 지하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1932년부터 이회영 선생의 비밀결사단인 동아흥산사의 국내 책으로 암약하던 중 1942년 대의원총회 장소에서 박종화, 심훈, 김창환 선생 등 60여 분과 함께 일본 경찰에 의해 전원 체포 투옥됐다. 1944년 조국광복을 눈앞에 두고 대구형무소에서 장렬히 옥사했다. 정부는 공의 숭고한 구국투쟁과 애국정신을 기려 198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건국훈장 애족장 임긍호 선생
임긍호 선생은 1920년 상경해 배재학당에서 수학하고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가 광도고보에서 학업에 정진했다. 1923년 9월 1일 일어난 일본 관동대지진으로 야기된 조선인 학살만행을 목격하고 약소민족의 비애를 통감해 학업을 중단하고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 백범 김구 선생의 휘하에서 의경단원으로 활동하며 소임을 다한다.

또 불란서 조계에서 일어난 소란을 평정하는데 협력, 한불 양국의 친선을 도모했다. 불란서는 교민단장 여운형에게 감사를 표시했다. 한불 양국의 우호관계 때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해 불란서 조계에서 오랫동안 존속할 수 있었다고 민족운동 사료집 중국편에 수록돼 있다. 임시정부의 재정난이 심각할 때 동지를 국내로 밀파해 종제 임풍호의 도움을 받아 독립운동자금 900원을 임시정부에 송금하도록 했다.

1927년 귀국해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고 독립운동을 벌인 협의로 1930년 체포되어 부여경찰서에서 6개월 동안 복역했다. 또 다음해 다시 청양경찰서에 검거돼 8개월 동안 고초를 겪었다. 그 뒤로 요시찰 인물로 지목돼 부단한 감시와 협박, 수모를 받았으나 일체의 타협을 거부하고 마침내 조국광복을 맞았다.
해방 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참여해 민족정기를 바로잡고자 하였으나 미군정과 이승만을 등에 업은 친일세력의 방해책동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정부는 1990년 8월 15일 선생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독립운동 업적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화성면 지역의 3·1만세운동
1919년 3월 1일 조국의 독립을 위한 만세운동이 전국으로 전개되었고 화성면에서는 4월 5일 화성장터(산정리)에서 수백 명이 무한천을 중심으로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4월 8일에는 농암리에서 결혼식을 마치고 돌아가는 하객까지 합세하여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벌였고 밤에는 매봉과 왕정봉, 지럭재에서 횃불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에 놀란 일본 헌병은 만세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만세운동으로 검거되어 형을 받은 주민이 화성면에서만 39명(태형 90도 26명, 70도 2명, 60도 2명, 50도 1명, 40도 8명, 징역 6월 1명)에 이르고 수정리는 8명의 주민이 형을 받았다. 이 가운데 임상덕은 태형 90도를 맞고 후유증으로 같은 해 9월 별세했다. 그 당시 목숨을 내걸고 앞장서 독립만세운동을 벌이다 형을 받은 수정리 물안이 마을 주민들은 다음과 같다.

△임상덕 태형 90도 건국포장 △임한영 태형 90도 대통령 표창 △임준호 태형 90도 대통령 표창 △김용옥 태형 90도 대통령 표창 △김만식 태형 90도 미포상 △안두종 태형 90도 미포상 △윤상진 태형 70도 미포상 △하래선 태형 40도 미포상.
한편 김만식과 안두종은 정부로부터 포상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으나 후손들이 나타나지 않아 아직까지 국가유공자로 추서되지 못하고 있다.

<자료제공 : 국가보훈처, 참고문헌 : 홍주의병실록>
 정리=프리랜서 정재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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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등은자에아조선의독립국임과조선인의자주 2022-03-02 00:16:02
덕분에 고맙게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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