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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명물 - 용당리‘찰방기적비’로 본 조선후기 청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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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명물 - 용당리‘찰방기적비’로 본 조선후기 청양
  • 프리랜서 정재봉
  • 승인 2012.04.16 10:00
  • 호수 9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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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은 종6품 금정역 찰방이었다

지금은 폐교가 된 용당초등학교(화성면 용당리) 입구에는 조선후기 최고의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흔적은 정약용이 청양 금정역의 찰방으로 재임했다는 ‘찰방기적비’이다.
금정역(금정도)은 조선시대 역원 체제가 유지될 때 충청 중서부의 중심 역이었다. 현재의 화성면 용당리 용곡이 금정역의 옛터로 조선시대에는 청양~대흥, 청양~결성~홍주~보령~서산~태안지역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였다. 1535년(중종 30년)에 전국의 큰 역에 40명의 찰방을 두고 이를 찰방역이라 하였는데, 금정역에도 종6품인 찰방과 종9품인 역승이 파견되어 도내의 역 행정을 관할했다.

금정역이 청양 역사에서 특별히 부각되는 것은 금정도의 거점이라는 교통상의 중요성과 함께 다산 정약용이 찰방으로 부임했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다산 정약용은 1795년(정조 19년) 가을 금정 찰방으로 부임했다. 당시 정약용은 주문모 신부 사건에 연루되어 있었던 상태였다.

주문모 신부는 중국 강소성 출신으로 1794년(정조 18년) 베이징 주교 구베아의 명을 받고 조선에 들어와 1795년 6월초 서울에 도착한 후 숨어 지내면서 포교 활동을 전개하던 인물이다. 그러나 한영익의 밀고로 체포령이 내려졌고 그를 돕던 수많은 이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관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때 정약용은 매부지간이며 학문적 교류가 있었던 이가환과 더불어 처벌을 받게 되어 이가환은 충주목사로, 정약용은 청양현의 금정찰방으로 좌천된다. 이 조치에 대해서는 ‘사학교도’의 활동이 가장 극심한 지역에 관리로 보내어 이들을 속죄시키려 했다는 견해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산을 총애하던 정조와 번암 채제공이 다산을 보호하기 위한 배려였다는 견해도 있다.

이런 추정이 가능한 것은 천주교를 사학으로 여기며 적극적으로 탄압하던 시기에 천주교 연구에 심취해 있던 주요 인물에 대한 처벌로서는 매우 가벼운 것이었다는 점에서이다.
특히 금정역 주변 지역이 채제공의 일족인 평강 채씨들이 대대로 살고 있던 지역이라는 점에서 그러한 짐작이 가능하다.

정약용은 금정역에 부임하면서 이때의 일들을 기록한 ‘금정일록’을 남겼다. 금정일록은 다산 정약용의 금정시절의 일기로 금정일록을 통해 정약용 개인의 일상과 사상은 물론이고 1700년대 후반의 정치적 상황, 청양지역 향촌사회의 동향 등을 적고 있다.
금정일록에 의하면 정약용은 금정에 도착하자 곧 천주교도로 지목된 백성들을 자수시키기 위한 노력과 제사지내기를 권유했다. 이러한 방식은 정조의 천주교에 대한 처리 방식이기도 했다.

조선후기 천주교가 유입되면서 본격적으로 전파될 당시 국가에서는 충청지역을 사학에 물든 위험 지역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조선왕조실록 1791년(정조 15년)의 천주교 관련 기록을 보면 경기와 호서 지방은 손을 쓸 수 없을 지경이라고 한탄하고 있다. 호서지역은 서해안과 접해 있어 외국의 문물이 들어오기 용이한 지역이었던 까닭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내포지역을 중심으로 천주교가 급속히 퍼져 나가고 있었다. 청양지역도 내포의 범주에 드는 고을로 김대건에 이어 두 번째 한국인 신부인 최양업(1821년~1861년)의 고향이다.

최양업의 부모가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는 것으로 보아 1800년대 이전에 이미 청양지역에도 천주교가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금정일록’에서 정약용이 체포했던 사학죄인 김복성, 이수곤 외 4인의 경우도 아마 청양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한편 정약용은 금정 주위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던 평강 채씨들과 교류를 가졌다. 평강 채씨들은 체제공의 할아버지 성윤의 형제인 명윤, 팽윤과 같이 숙종조 정변을 피해 낙향한 이래 세거하고 있던 집안이었다.
금정역과 인접한 구봉산 아래 어재동(현 청양군 화성면 구재리)은 바로 채제공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정약용은 채제공과 인척 관계인 채준공과 채홍선 등을 직접 만났으며, 채씨들 외에 이 일대 기호남인 혹은 성호학파 인물인 이광교, 이명환, 권기, 강이오, 윤취협, 이도명, 신종수 등과 함께 오서산을 오르거나 시를 짓기도 했다. 정약용은 이들과 지속적인 교류를 통해 그리고 서울의 기호남인계 중진 원로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기호남인들과의 정치적 결속을 다져 나갔다.

금정일록은 정약용이 금정찰방에 재임하였던 6개월간의 기록이다. 정약용은 그동안 정조의 의도대로 천주교에 깊이 빠진 청양주변 지역 주민들을 회유하여 개종시킴으로써 다시 중앙 정계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금정 시절의 일들로 인하여 훗날 배교자로 낙인을 찍히기도 했다. 정약용이 금정에 머물렀던 것은 불과 반년도 채 못 되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호서지역의 사족들, 특히 기호남인계 인물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아마도 그가 관리로 있던 금정역 주변에 대한 영향력은 더욱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경세치용과 이용후생, 실사구시 사상을 바탕으로 했던 실학자였던 만큼 청양지역 농민의 삶에 대해서도 남다를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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