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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양의 항일독립운동가 한훈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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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양의 항일독립운동가 한훈 선생
  • 프리랜서 정재봉
  • 승인 2012.04.02 11:40
  • 호수 9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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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총독과 을사오적을 단호히 처단하자”
청양지역의 항일독립운동은 1905년 치욕적인 을사조약의 체결에 따라 일어난 을사의병봉기로부터 시작됐다. 구한말 최고의 을사의병봉기로 평가받고 있는 홍주의병. 그 중심에 청양인들이 있었다. 이후 청양의 항일운동은 1919년 대대적으로 일어난 정산3·1만세운동과 운곡횃불만세운동에 와서 그 정점을 이루었고, 충청지역 항일학생운동을 주도하는 등 다양한 형태로 진행된다. 청양신문은 국가보훈처의 도움을 받아 청양의 항일독립운동에 참여한 인물들을 찾아 그들의 업적과 민족정신을 살펴본다.
청양지역의 항일독립운동은 1905년 치욕적인 을사조약의 체결에 따라 일어난 을사의병봉기로부터 시작됐다. 구한말 최고의 을사의병봉기로 평가받고 있는 홍주의병. 그 중심에 청양인들이 있었다. 이후 청양의 항일운동은 1919년 대대적으로 일어난 정산3·1만세운동과 운곡횃불만세운동에 와서 그 정점을 이루었고, 충청지역 항일학생운동을 주도하는 등 다양한 형태로 진행된다. 청양신문은 국가보훈처의 도움을 받아 청양의 항일독립운동에 참여한 인물들을 찾아 그들의 업적과 민족정신을 살펴본다.

광복단 결사대 조직 ‘한훈’
한훈(1890~1950) 선생은 1890년 2월 27일 청양군 사양면(남양면의 옛 이름) 흥산리에서 한성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당숙인 한호교에게 입양됐다. 선생은 5척 단구의 야윈 몸을 가졌지만, 대담하고 침착한 성격을 지닌 투사였다고 전해진다.
청양은 일제의 지계사업(조선총독부로 하여금 조선 산업전반의 착취와 민족자본의 성장을 철저히 억압한 정책)에 항거한 농민운동이 발생했던 지역이며, 청양인들은 충남의 대표적 의병인 홍주의병의 중심으로 적극 가담했다. 한훈 선생도 1906년 홍주의병의 소모장으로 참여한다.

당시 선생은 홍주의병 가운데 이용규 휘하에 소속돼 부여·노성·연산·정산·공주 등에서 항거하다가, 홍주의병이 실패한 후 신도안으로 가 비밀결사를 조직, 나철·오기호 등과 을사오적 처단계획을 수립한다. 그러나 나철 등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면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선생은 악질 직산군수를 처단하고 만주로 1차 망명길에 오른다.

만주행은 선생의 항일투쟁에 있어 일대 전기가 된다. 선생은 만주와 국내를 오가며 뜻을 같이하는 많은 애국지사들과 접촉할 기회를 가지게 된다. 채기중과의 만남은 선생의 독립운동에 전환점이 되었다. 선생은 채기중·유창순 등과 함께 1913년 풍기에서 광복단을 조직했다.
선생은 급선무였던 무기 구입을 위해 광복단 대표로 직접 만주로 건너가 권총을 구입, 홍주의진 출신의 곽한일·김재순 등과 조선침략 원흉 처단 계획을 세우고 군자금 수합 활동을 벌이다 발각돼 만주 봉천으로 망명한다.

이후 다시 국내로 잠입한 선생은 대한광복회에서 활동하게 된다. 대한광복회는 군자금 조달·혁명기지 건설·총독 및 친일부호 처단·무기구입·독립군 양성 등을 목적으로 한 단체였다.
선생은 1917년 친일부호인 경북 칠곡의 장승원 처단을 시작으로 광복회 내에서도 의열투쟁을 선도했다. 장승원 처단사건 이후 대한광복회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단원들이 일경에 체포되고 주요 인물들이 사형 당하는 등 조직이 거의 파괴됐다. 와중에 선생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광복단 결사대를 조직하여 대한광복회의 명맥을 이어갔다.

이후 선생은 만주를 오가며 새로운 항일투쟁 방법을 모색했다. 그러던 중 3·1운동을 계기로 우재룡·권영만 등과 함께 상해 임시정부와 연계해 광복단 결사대를 조직한다. 광복단 결사대는 모병과 암살을 주된 목적으로 했고 상해 임시정부와 만주에 요원을 보내 군사훈련을 받게 했다. 선생은 중국 안동으로 들어가 임시정부 파견 요원으로부터 다량의 무기와 탄약을 받아 압록강을 건너 국내에 반입하는 등 기반을 갖추게 된다.

광복단 활동은 애국단체 좌표
선생은 또 김상옥과 함께 친일 조선인과 형사를 처단하고 조선인 부호들로부터 모금한 군자금을 길림군정서에 제공해온 서울의 한 암살단과도 연계한다.
광복단 결사대와 암살단은 첫 거사로 미국의원단이 내한했을 때 환영 나온 조선총독 및 정무총감 등을 처단키로 한다. 하지만, 미국위원단이 도착하기 하루 전 일경의 예비검속이 이루어지면서 김상옥의 집이 수색을 당한다. 김상옥은 탈출하는데 성공했으나 선생은 체포된다.

광복단 결사대장으로 활동한 선생은 징역 8년형을 받았으나, 이후 서도현 등을 처단한 것이 추가로 확인돼 5년형이 추가된다. 옥고를 치르는 중에도 단식 등 불굴의 저항의지를 표출한다.
1929년 선생은 형 집행 정지로 풀려났다. 선생은 출옥 후 옥고로 인해 얻은 병과 일제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충남 신도안에 은거하면서 학병 거부자와 탈출병 등을 은신시키면서 이들에게 배일사상을 고취하는 활동을 하다가 광복을 맞았다.

선생은 광복 후 광복단을 재건하고 광복정신에 기초한 자주적 독립국가의 완성을 목표로 임시정부의 이념에 따라 자주적 독립국가의 수립을 추진하면서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전개하고,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모든 단체가 통합할 것을 주장했다. 또 광복의숙 설립, 실험농장 설치, 동서문화연구회 조직 등을 계획하면서 민족교육과 산업의 부흥을 꾀했다. 당시 광복단의 활동은 방향성을 잃고 방황하던 많은 애국단체들의 좌표가 됐다. 선생은 한국전쟁 중 북한군에 납치되어 피살됐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한훈 선생은 지난 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자료제공 : 국가보훈처, 참고 : 청양군지, 정리 : 프리랜서 정재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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