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숲에는 뭔가 있다
숨어서 밤 되기를 기다리는 누군가 있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렇게 은근할 수가 있는가
짐승처럼 가슴을 쓸어내리며
모두 돌아오라고, 돌아와 같이 살자고 외치는
소나무숲에는 누군가 있다
어디서나 보이라고, 먼 데서도 들으라고
소나무숲은 횃불처럼 타오르고
함성처럼 흔들린다
이 땅에서 나 죄없이 죽은 사람들과
다치고 서러운 혼들 모두 들어오라고
몸을 열어놓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바람 부는 날
저렇게 안 우는 것처럼 울겠는가
-이상국 시 ‘소나무숲에는’ 부분
등이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청양읍 백세공원의 지천을 걷는다. 평촌으로 건너가는 징검다리 사이사이로 흘러내리는 물보라가 반짝이며 무지갯빛을 만든다. 어귀말이라고도 부르는 평촌을 지나 월촌 입구에서 마른논의 검불을 태우는 어르신께 월촌 뒷산에 대해 듣는다. 산 모양이 반달처럼 생겨서, 항상 달이 뜨는 것이 보인다 하여 월봉산이라 한다며, 1시간 반 정도 걸리는 등산로가 얌전(?)하고 편하다고 한다.
월촌에서 대청로 오르는 길로 접어든다. 이방인을 향해 사납게 짖는 삽살개의 따가운 눈총이 멀어질 즈음, 툭 하니 말라 단단해진 탱자 한 알(사진1)이 떨어진다. 날카로운 가시 속에는 보드랍고 향기롭게 매달렸던 열매 몇 알이 남아 있다. 샛노랗던 색이 짙어지면서 가는 이와 오는 이와의 자연스런 만남을 기다리는 것은 아닌가.
대청로에서 산에 오르는 몇 개의 길이 있으나, 어느 길로든 오르다 보면 포장된 길과 만나게 된다. 포장된 오름길 끝으로 공사 중인 암자와, 큰 나무에 기댄 듯 서 있는 석탑(사진2)을 본다. 꽃이 한창인 시절이 되면, 산 중턱 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그곳이 월봉암이라는 것을 읍내에서까지 훤하게 짐작했던 기억이 난다. 아, 그곳이 이곳이었구나.
고요하다. 발걸음 한 번에 작은 한 번의 속삭임만 있을 뿐,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바람과 햇살과 구름으로, 역시 고요 속에 푹 잠겨있다. 부드럽게 넘어진 소나무는 그대로 잎이 무성하고, 마른 고사리밥으로 숲을 이룬 산 정상에 오르니 길이 세 갈래로 나 있다. 북쪽은 대치면 탄정리로 내려가는 길이고, 서쪽은 교월리 평촌길이다. 나무 사이로 청양읍내의 모습이 훤히 드러나는 능선을 타고 걸으니 정말 낮에 나온 반달 같다.
왼쪽의 온통 어린 소나무가 자라고 있는 산자락이 보이는 남쪽 길로 내려오다 보면, 큰 집게발의 가재가살고 있을 듯한 맑고 얕은 계곡물(사진3)과 동행하게 된다. 한 동안 명랑한 물소리를 들으며 걷다보니 ‘성시천’이란 명찰이 조그맣게 붙어있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쑥과 노랑꽃, 냉이가 눈에 띌 듯 말 듯 논둑에 나와 있다. 가늘고 긴 은천동길을 빠져나오며, 벽천교 위에서 봄기운이 가득한 월봉산을 돌아본다.
매끈하게 정리된 무덤 뒤로 소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어, 먼 조상들과 새로 오는 이들을 만나게 한다. 날마다 누군가를 기다리듯, 아직 오지 않은 것들을 기다리는, 모든 것을 다 품고자 하는 몸짓의 소나무숲(사진4)은 잊지 않으려 하는 간절한 기대, 마음과 마음이 주고받고 위로하는 끈끈하고 소박한 정감을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