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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우시장에서 가슴 시린 삶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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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우시장에서 가슴 시린 삶을 만나다
  • 프리랜서 김현락
  • 승인 2012.02.27 14:26
  • 호수 9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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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해볼 도리가 없어서
소는 여러 번 씹었던 풀줄기를 배에서 꺼내어
다시 씹어 짓이기고 삼켰다간 또 꺼내어 짓이긴다.
- 김기택 <소> 전문

소의 커다란 눈은 무언가 말하고 있는 듯한데
나에겐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
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 있는 것 같다.

말은 눈물처럼 떨어질 듯 그렁그렁 달려 있는데
몸 밖으로 나오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마음이 한 웅큼씩 뽑혀 나오도록 울어보지만
말은 눈 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수천만 년 말을 가두어 두고
그저 끔벅거리고만 있는
오 저렇게도 순하고 동그란 감옥이여.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서
소는 여러 번 씹었던 풀줄기를 배에서 꺼내어
다시 씹어 짓이기고 삼켰다간 또 꺼내어 짓이긴다.
- 김기택 <소> 전문

‘음-메’ 소리가 하얀 입김과 함께 검은 하늘에 무늬를 만들며 사라진다. 새벽 찬 바람이 시린 것이 아니라 그 떨림이, 북적대는 입김이, 아직 코뚜레를 하지 못한 부드러운 코끝(사진1)이, 대롱대롱 매달려 언제 떨어질지 모를 콧물이 마냥 시리다.

사진2

청양장날 꼭두새벽, 하늘의 별들도 아직 잠자고 있는 시간, 환하게 불 밝힌 청양우시장에는 소와 사람들로 가득 찼다. 가마솥에 쇠죽 쑤는 냄새에 익숙해졌을 동부레기 몇 놈(사진2)이 나란히 엉덩이를 맞댄 채, 이별을 예고라도 하듯 뒷발질을 하며 서로를 확인하기도 한다. 몽고반점이라 할까, 주홍글씨라 할까, 소 엉덩이에 찍힌 은빛 쇠도장(사진3)이 전등불 밑에서 반짝인다.

사진3

청양산토종한우라는 빛나는 노란 명찰을 귀에 달고, 목을 쭉 빼고, 이리저리 턱을 돌리며, 눈을 맞추려 하는 송아지들. 온갖 마음을 담은 눈빛이 고요해서 더 슬프다. 그렇게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그들이 삶을 대하는 지극하고 순한 방식일 것이다. 멀고 또 깊은 동공일지라도 그곳을 통하여 소는 모든 것을 받아 삼켰다가, 꺼내어 씹고 잘게 버무려서 다시 삼키는 것이다.

사진4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송아지를 데리고 나온 어미 소의 눈가에 지분지분 눈물이 말라 있다. 어미 소의 마음도 모른 채, 잠이 깨지 않은 송아지는 많은 형님 소들과,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눈부신 형광등불에 다른 세상에 온 듯 멀뚱거리고 있다. 초조하고 불안한 어미 소는 긴 혀로 송아지를 쓸고 닦아주며, 제발, 그 누구도 송아지가 마음에 들지 않기를 기도한다. 어미 소의 소리 없는 아우성을, 뼈를 가르는 몸짓을 어린송아지는 오래오래 잊지 않을 것이다(사진4).

소는 평생 묵묵히 노동하는 늙은 촌부, 우리 아버지들을 닮았다. 늙은 소의 얼굴은, 껌뻑껌뻑 올라오는 굵은 눈꺼풀은, 주름이 깊게 팬 아버지들의 얼굴이다. 기계와 빠름을 거부하고 천천히 자연그대로의 땅을 지킨 늙은 아버지들의 고집이다.

소들과 함께 나온 아버지들을 위한 휴게소가 환하다. 밖과 안의 온도차이로 물방울이 방울방울 맺힌 유리창너머로, 그동안 같이 살아온 소와의 정을 떼기 위한 아버지들의 넋두리와 미련이 달콤한 커피향속에서 동동거린다.

턱 밑의 조그만 워낭이 풍경소리를 내는 새벽! 어린 송아지의 겁 많은 보드라운 입김이, 유년의 우리를 키우기 위해 헌신했던 이 땅 모든 소의 그렁그렁한 눈망울이 맴도는 우시장. 길고 가는 속눈썹이 우주를 열어젖히면 갈 데까지 다 간 마음, 올 데 까지 다 온 마음이,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여명 속으로 사라지는 별빛보다 더 서글픈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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