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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을 찢고 꽃을 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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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을 찢고 꽃을 피웠다
  • 프리랜서 김현락
  • 승인 2012.02.13 11:21
  • 호수 9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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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앨범

- 장옥관 ‘꽃을 찢고 열매 나오듯’ 전문
싸락눈이 문풍지를 때리고 있었다.
시렁에 매달린 메주가 익어가던 안방 아랫목에는 갓 탯줄 끊은

동생이 포대기에 싸인 채 고구마처럼 새근거리고 있었다.
비릿한 배내옷에 코를 박으며 나는 물었다.
-엄마, 나는 어디서 왔나요.
웅얼웅얼 말이 나오기 전에 쩡, 쩡 위뜸 못이 자위를 트는 소리 들려왔다.
천 년 전에 죽은 내가 물었다.
-꽃을 찢고 열매 나오듯이 여기 왔나요. 사슴 삼킨 사자 아가리 찢고 나는 여기 왔나요.
입술을 채 떼기 전에 마당에 묻어놓은 김장독이 배 부푸는 소리 들려왔다.
말라붙은 빈 젖을 움켜쥐며 천 년 뒤에 태어날 내가 말했다.
-얼어붙은 못물이 새를 삼키는 걸 봤어요. 메아리가 메아리를 잡아먹는 걸 나는 들었어요.
송골송골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으며 미역줄기 같은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얘야, 두려워마라. 저 소리는 항아리에 든 아기가 익어가는 소리란다.
휘익, 휘익 호랑지빠귀 그림자가 마당을 뒤덮고 두리기둥이 부푼 배를 안고 식은땀 흘리던 그 동짓밤,
썰물이 빠져나간 어머니의 음문으로
묵은 밤을 찢은
새해의 동살이 비쳐들고 있었다.

- 장옥관 ‘꽃을 찢고 열매 나오듯’ 전문

손조심이라 쓴 유리문을 살그머니 밀자, 아기자기한 야생화의 소곤거림이 들리는 듯하다.  
깨진 독에 붙어서 뿌리와 줄기와 잎이 한 몸으로 어우러진 상록고사리(사진1)가 제일 먼저 반긴다. 흙 속으로 들어가 있어야만 뿌리 아닌가? 의심도 잠시, 여기저기 신기하고 귀엽고 예쁜 것들이 많아 입이 벌어진다.
의젓하고 당찬 바위솔이 오뚝이처럼 서있고, 앙증맞은 어린 거미줄바위솔은 몸에 털옷을 두른 채 붉은 자갈밭에서 쌩끗 눈짓을 한다. 돌단풍은 또 어떤가, 조그마한 바위에 착 붙어 빨간 꽃송이 송이를 거친 잎으로부터 숨길 듯 말듯 조심스럽게 보여주고 있다.
뽀얀 솜털을 자아내느라 긴긴 겨울밤을 꼬박 샜을지도 모를 동강할미꽃.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처럼 홀로 고고한 까마귀밥여름나무. 앙 다문 잎에서, 팍 하고 금방이라도 하나 둘 꽃잎을 터트릴 것 같은 다홍빛 꽃봉오리를 품은 명자나무. 장생란이라 부르기도 하는 석곡(사진2)의 맑고 청초한 하얀 꽃은 금방 무슨 말이라도 걸어올 듯이 다정하고, 참하고 단단해 보이면서도 소박한 사철란은 여러 야생화속에 다소곳이 파묻혀 있다.
이런, 이끼도 꽃을 피우는 줄 몰랐다. 서리꽃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에 해바라기하는 이끼꽃을 보니 생소하면서도 미안한 생각이 든다. 
먼발치에, 어느 곳에서나 항상 조용하고 순한 노루귀(사진3)의 솜털이 자꾸만 흔들린다. 어디 바람이라도 들어오는지 휘둘러본다. 차마 고개 들지 못하는 그 무슨 사연이라도 지녔는지 수줍어 몸 둘 바 없는 자태에 보는 이의 마음 역시 수줍어진다.
하얗게 핀 서리꽃까지 아름다운 청양읍 학당리 ‘칠갑산야생화’ 농원의 자잘한 야생화들은, 고개를 숙이거나 아니면 쪼그리고 앉아 그들 곁으로 다가가야만이 볼 수 있다. 이 꽃들을 대하는 순간만은 더 없이 몸을 낮추지만, 결코 낮춰지지 않는 배려와 소중함을 배운다.    
기다림이랄까 아니면 살아있음의 환희랄까. 그 추운 겨울을 당당히 이겨내고 자잘한 봉우리를 피워낸 승리랄까. 아니면 희망의 시작이랄까. 생명탄생의 순간은 늘 경이롭고 신비하듯이, ‘꽃을 찢고 열매 나오듯’ 줄기를 뚫고 나오는 야생화들은 스스로를 지탱하는 힘과, 그들을 잊지 못해 찾아주고 보아준 든든한 발자국소리와 온화한 눈길을 먹으며 꽃을 피운다.
오늘도, 두런두런 말소리와 찬바람에 더께가 진 따스한 손길에 천냥금(사진4), 백자단이 울리고 조팝나무가 계절에 초연한 채 꽃을 피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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