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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가 땅을 포기하면 농촌 미래는 어둡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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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가 땅을 포기하면 농촌 미래는 어둡지요
  • 이순금 기자
  • 승인 2012.02.13 10:52
  • 호수 9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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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이웃 - 대치면 광금리 강낙규 씨

오늘은 젊은 농군 강낙규(35·대치면 광금리) 씨를 만나본다. 요즘 농촌에서는 60대도 청년에 속할 정도로 젊은이들의 모습은 거의 볼 수 없다. 강씨가 살고 있는 광금리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보니 농사 등 마을 일을 맡아 할 일꾼이 없고, 이런 이유만으로도 30대인 강씨는 노부모 뿐 아니라 이웃어른들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다. 하루를 48시간처럼 바쁘게 생활하는 강낙규 씨를 소개한다.  

농기계수리도 척척 베테랑 농부
강씨는 30대 젊은이지만 농사꾼이 된 지 벌써 15년째로 고향에서 아버지 강희화(81) 씨와 어머니 이차순(73) 씨를 성심껏 봉양하며 생활하고 있다.
“부모님께서 농사를 지으셨는데 건강이 안 좋으셨어요. 때문에 누군가 일을 도와드려야 했죠. 9남매 중 제가 여덟째로 형과 누나, 동생은 모두 출가해 타지에서 생활하고 있었고, 그래서 제가 고교 졸업 후 농사를 돕기 시작한 것입니다. 형제들은 물론 저도 학교 다니면서 틈틈이 농사를 도왔기 때문에 계속 농사를 지으며 살아야지 하는 생각은 안했었어요. 하지만 연로하신 부모님께만 맡겨놓을 수 없었고, 특히 제가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진학을 해야 할 당시 가정형편이 어려워진 것도 진로를 결정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 같아요.”

이런 이유로 강씨는 고교 졸업 후 부모를 도와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특히 그는 청양농공업고등학교 농기계과 출신으로 농기계수리도 척척 해 내는 베테랑이었다. 그는 그렇게 7년 동안 열심히 일했고, 스물일곱 살 겨울 갑자기 천안의 한 전자회사에 취직을 하게 된다.
“친구를 따라 취직했습니다. 잠깐이라도 농사가 아닌 다른 일을 해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집을 떠나지는 않았고, 전자회사였는데 3교대여서 집에서 출퇴근이 가능했습니다.”

농사를 지으면서 직장을 다녔던 그는, 그러나 1년 만에 직장을 접게 된다. 부모를 돕는 차원이 아닌 본인이 전적으로 농사에 뛰어들기 위해서다. 
“저 고등학교 때 어머니께서 풍을 맞으셨고 치주염으로 병원도 많이 다니셨어요. 아버지께서는 그래도 비교적 건강하셨고요. 하지만 점점 안 좋아지시더군요. 그래서 직장을 그만뒀죠. 그런데 직장을 그만두자마자 아버지께서 뇌졸중으로 쓰러지셨어요. 그래서 본격적으로 논·밭농사를 맡아 지었고, 표고재배도 그때부터 시작했어요.”

강씨는 논·밭농사만으로는 농가소득을 올릴 수 없다고 판단, 사촌형의 도움을 받아 표고재배를 시작했다. 29살 때였고, 직장을 다니며 번 1000만원을 종자돈으로 종균과 묘목을 구입했다. 하지만 첫 도전은 실패였다.
“노지재배를 했는데 잘 안 됐습니다. 이후 하우스로 바꾼 후 조금씩 양을 늘려갈 수 있었어요. 현재 7동에 표고버섯재배를 하고 있습니다.”

진학포기 농사선택 ‘후회 없어’
강씨는 대학 진학이 아닌 농사를 선택한 것에 후회하지 않는단다.
“고교 졸업당시 형편이 어려웠지만 땅은 있었어요. 그래서 부모님께서 대학에 진학하겠다면 땅을 팔아서 대 주겠다고 하셨죠. 어머니께서 공부를 못한 한이 있으셔서 자식들이 공부하는 것에 적극 지원을 해 주셨거든요. 하지만 저는 땅을 팔아서까지 공부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 선택에 후회 없고 앞으로도 절대 땅을 파는 일은 없을 겁니다.”

땅을 사랑하는 강씨는 농기계에 대한 애착도 크다. 그 때문에 그의 집 창고에는 농사에 필요한 온갖 농기계가 가득하다.
“농촌에 일꾼이 없잖아요. 때문에 농기계 없이는 농사를 지을 수 없어요. 그래서 구입했고, 또 수리와 관리를 제가 다 할 수 있어서 큰 도움이 됩니다. 제가 기계에 대해 잘 알고 있어서 마을 상수도와 건조기 등 관리도 맡아 하고 있어요.”

자신의 농사 뿐 아니라 마을 일에도 적극적인 강씨는 농촌체험마을인 광금리 칠갑산산꽃마을 사무장으로서도 일을 했었다. 1년 6개월 여 동안이었다. 
“우리 마을에 20, 30대가 3명이에요. 또래가 없죠. 그것 때문에 좀 힘든 것 같아요. 이렇듯 소소한 어려움은 있지만 그래도 저는 시골이 좋습니다.”

“부모님 걱정 덜어드릴 수 있어 다행”
강씨는 9남매를 기르느라 평생 고생한 부모에게 앞으로 더 잘 하겠다는 다짐을 전했다. 특히 “아버지는 농부로, 어머니는 농부의 아내이면서 농한기면 옷은 물론 장류까지 만들어 장사를 할 만큼 부지런한 사람이었으며, 그렇게 번 돈으로 땅을 사 농사를 짓고 아이들을 가르쳤다”며 앞으로 부모가 건강하게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한다.

“고생 많이 하셨고 또 그동안 부모님이 제 걱정을 가장 많이 하셨어요. 결혼이 늦어져서요. 하지만 결혼을 앞두고 있어요. 걱정을 덜어드린 거 같아 좋습니다. 건강하셨으면 좋겠어요.”
그는 또 평생 고생만 한 부모가 편히 살 수 있도록 5년 전 살던 집을 다시 지었다. 대출을 받아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한 일 중 집을 지은 일이 가장 잘 한 것 같다고 전한다.

강씨의 성격이 덜렁덜렁해서 부모는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 같다”는 말을 자주 한단다. 하지만 일을 할 때는 딴전피우지 않고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아들이 곁에 있어 든든하단다.
강씨는 표고버섯재배를 비롯해 논·밭농사를 앞으로도 열심히 해 나갈 것이란다. 특히 현재 7동인 표고버섯 재배를 10동까지 늘려나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한다.

강씨는 오는 19일 결혼식을 올린다. 부모의 바람이 이뤄진 것이다. 강씨는 앞으로도 노부모를 봉양하면서 부지런한 농부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어머니께서 시집 오셨을 때 정말 가난했답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함께 밤낮없이 일했고, 땅을 사 농사 지으셨답니다. 덕분에 9남매 모두 잘 컸어요. 부모님께 누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생활하겠습니다. 부모님 잘 모시면서요.” 강낙규 씨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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