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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어있으나 꽉 찬 적멸보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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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어있으나 꽉 찬 적멸보궁
  • 프리랜서 김현락
  • 승인 2012.01.30 15:48
  • 호수 9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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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자란 생각 끝에서 꽃이 피었다
생각 위에 찍힌 생각이 생각에
지워지는 것도 모르고
  -장석남의 <맨발로 걷기>전문

생각난 듯이 눈이 내렸다

눈은 점점 길바닥위에 몸을 포개어
제 고요를 쌓고 그리고 가끔
바람에 몰리기도 하면서
무언가 한 가지씩만 덮고 있었다

나는 나의 뒤에 발자국이 찍히는 것도
알지 못하고 걸었다

그 후 내
발자국이 작은 냇물을 이루어
근해에 나가 물살에 시달리는지
자주 꿈결에 물소리가 들렸고
발이 시렸다

또 다시 나무에 싹이 나고
나는 나무에 오르고 싶어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잘못 자란 생각 끝에서 꽃이 피었다
생각 위에 찍힌 생각이 생각에
지워지는 것도 모르고
  -장석남의 <맨발로 걷기>전문

 

꽃도 향기도 얼어버린 연밭이다(사진 1). 맑게 개어서 더 추운 저녁, 연밭 머리위로 개밥바라기와 초승달과, 시퍼런 산등성이에 곱게 한 가닥 석양이 걸터앉았다. 초승달만큼이나 휘어버린 마음이, 꽃도 향기도 나비도 물리친 무덤덤한 연 줄기 앞에서 홀로 고고하다.

▲ 사진 2

그래도 한 때는 참으로 찬란했던 대치면 광금리 연밭(사진2), 연일 뭍사람들이 찾아와 오욕과 진흙탕 속에서 외로우나 화려하게 피어난 얼굴에 손을 맞추고 호흡을 하고, 닮고 빼앗고 싶어 하는 마음에도 물들지 않은 그 고고한 마음이, 지금 얼어붙은 눈 속에 푹 파묻혀 있다.

▲ 사진 3

머지않아 다시 새로운 줄기가 초록의 힘을 얻어 일어날 것이다. 초롱초롱한 이슬과 찬란한 햇살을 받고, 놀러오는 바람과 수런수런 이야기를 나누며, 줄기는 연분홍과 흰색의 화려하면서도 은은한 꽃(사진3)을 피울 것이다. 초심의 두근거리는 마음을 지닌 채 크고 작게, 길고 둥글게 본연의 뜻을 피어 나갈 것이다.
▲ 사진 4

드문드문 꽃의 마음이야 아랑곳없는 사람들이 찾아오면 아무런 생각 없이 그들을 위해 가랑가랑 몸을 흔들어 주기도 할 것이다. 그러다가 하나 둘 꽃잎이 떨어지면, 노랗고 가는 꽃술이 씨방을 둘러싼 모습(사진4)을 내 보일 것이다. 그때쯤이면 ‘내가 가고 있는 길’에 대한 믿음을 의심하게 될 것이다.
어디 연꽃뿐인가. 여러 갈래의 인생길 중에 내가 선택한 길, 나만이 갈 수 있는 길, 설혹 잘못 선택한 길일지라도 이미 들어서버린 길의 끝에서 꽃 피우는 생각의 생각을 해 본다. 누구나 세상에 나오던 날  자신 있게 깊은 숨을 들이쉬었듯이, 수많은 길들이 열려있을 때나, 그래서 어떤 길을 택해야 할지 몰랐을 때의 그 어엿븐 마음을 꾹꾹 생각에 찍어 놓는다. 스스로의 마음소리에 따라 걸어온 길이기에, 흔들리면서도 의심을 해 보면서도, 연꽃처럼 꿋꿋하게 믿어도 본다.   
세상의 독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결코 독을 내뿜을 줄 모르는 그들이 쉬고 있는 곳. 둘러보아도, 걸어 보아도, 꽃도 향기도 비어있는 적멸보궁 연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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