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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세월, 잿빛 어스름에 잠긴 ‘미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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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세월, 잿빛 어스름에 잠긴 ‘미궐사’
  • 프리랜서 김현락
  • 승인 2011.12.19 15:09
  • 호수 9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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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따라 느릿느릿 찾아가는 절집

흐트러지지 않고 다닥다닥 잘 매달린 개가죽열매와 옻나무의 까맣게 마른 열매를 보면서, 무엇이든 잘 늙는다는 것 또한 이런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길은 길인데 인적이 없어 잘못 들어선 것은 아닌가 하면서도 곳곳에 늦둥이처럼 드문드문 파랗고 어린잎들이 보여주는 맑은 얼굴을 보면서 무턱대고 올라간다. 놀러오던 바람도 멈추고, 나무도 잠든 듯한 가파른 오르막길이, 미궐산에서 뻗어 내려오는 산줄기가, 잿빛 하늘에 어슴푸레 내보인다.

목면 무술길, 잎진 사이길 콩깍지처럼 후미진 외딴집에 올라선다. 제일 먼저 반기는 곳은 붉은 문이 환한 해우소(사진1)다. 오르면서도 버리지 못한 것을 마저 버리라는 것인가. 앞마당에 들어서니 약수소리가 맑고 쟁쟁하여 풍경소리만큼이나 반갑다. 산속 길을 타고 내려온 물이 큰 두멍을 넘치며 푸른 사철나무에 물똥을 튀고 있다.


절마당 밑으로 웅덩이보다는 큰, 조그만 호수(사진2)에는 한철 잘 자랐을 물풀이 하늘과 소나무와 함께 잠겨있다. 호숫가 파밭에, 맑은 물속에 어우러진 노란 은행잎이 은근히 다가온다.

절집인데도 절집 같은 곳이 어디에도 없다. 다만 뒷길 산신각을 오르는 돌계단 사이에 놓여있는 두 개의 중돌에 새긴 ‘卍’자(사진3)와 ‘타불’에 파란 이끼가 자수처럼 피어있다.


덩그러니 유난히 큰 은행나무가 잔가지사이로 몇 잎 남은 햇살을 고르고 있다. 숲이 깊어 복사열이 미치지 못하는 음지 한쪽으로는 기도실인지 파란 포장이 환히 쳐져있고, 높고 푸른 기도소리가 숨죽인 미궐산을 살랑살랑 흔들곤 한다. 유리상자안의 촛불과 산신각에 켜 놓은 촛불의 움직임뿐 나뭇잎 하나 까딱하지 않는 절집엔 그저 작고 오목한 옹달솥과 담담한 돌담과, 하얗고 파랗게 꽃이 핀 돌길과 돌계단(사진4), 돌무더기 사이에 자란 초록 잡풀들뿐이어서 그저 걷고, 보고, 앉고, 움직이며 쉬는 일 모두 묵언수행의 한 부분 같다는 생각이 든다.
 
돌담사이로 뒷담벼락에는 나무를 엮어 울타리를 쳐놓았다. 긴 나무의자에 다리를 올려놓고 앉아 삼신각을, 숲으로 둘러싸인 올라온 길을 눈으로 찾는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란 나무들의 자유분방한 모습이, 얼기설기 줄거리가 꼬이고 늘어져 지저분하고 무질서한 듯 하면서도 정이 가는 자연그대로 순하게 자란 나무들을 본다. 

크고 울창한 오동나무에서 떨어진 자디잔 열매가 낙엽이라 하기에는 너무 농익은, 마르고 퇴색한 잎사귀와 솔가리 사이에 묻혀있다. 터줏대감인가, 길게 둘러서 있는 병풍 같은 돌몸에 두 개의 쫙 벌어진 나무가 문지기처럼 기대어 있는 사이로, 꽃발이라도 하던 청설모인지 놀라 달아나는 소리에 깜짝, 더 놀란 소름이 돋는다.

산비탈을 오르다 보면 비로소 내 몸의 무거움을 알게 된다. 천천히, 가붓하게 자주 멈추어 숨을 고른 다음 올라가다가 잠깐 뒤를 돌아보면, 눈부시게 아름다운 길이 보이고 묘한 현기증이 인다. 힘겨운 오르막길 끝 다다른 곳에서, 내가 걸어올라 왔던 길의 그 때 그 때를 되짚는다.
지나온 길을 또 지나도 새롭다. 환하게 내려다보이는 내리막길을 걸으며, 일부러 마음을 비우려 하지 않아도 몸과 마음의 무거움이 조금씩 가벼워지는 것을 느낀다. 비료포대에 가득 담긴 은행의 설렘에 귀를 모으고 내려오는 길, 조왕신과 주왕신의 배웅에 마음이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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