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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이웃 - 장승사 주지 성주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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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이웃 - 장승사 주지 성주스님
  • 이순금 기자
  • 승인 2011.09.19 11:16
  • 호수 9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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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전통의식 전하며 포교하는 ‘행복 스님’

오늘 만나볼 우리의 이웃은 남양면 봉암2리 장승사 주지 성주스님(65)이다.
성주 스님은  범패·나비춤 등 불교전통의식을 전하며 더불어 이웃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봉사를 실천하는 승려다. 아주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해 왔고 이런 성주 스님의 삶은 시나브로 주변인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40대 초반에 속가와 이별
장승사에 들어섰을 때 오늘의 주인공 성주 스님은 “언제 시간이 이렇게 흘렀는지, 어느 날 나이를 세어보니 예순 중반이더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어린아이처럼 해맑은 웃음으로 기자를 맞이했다. 그 웃음이 어찌나 싱그럽던지. 그리고 곧 “법명이 성주고 호가 대성이에요. 많은 분들이 성주와 대성, 어떤 것이 맞아요 하고 물어 오셔서 우선 설명하죠. 그리고 제가 글을 쓰고 있어서 문단에서는 ‘성주’, 또 ‘찬불가’음반을 냈는데 거기에는 ‘대성’으로 돼 있어요”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성주 스님은 공주가 고향으로 40대 초반인 1980년대 중반에 처음 법사 계를 받았다. 원주 금선사 법광 스님으로부터다.  늦은 나이였고 그는 그 때부터 관련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삭발은 처음 법사 계를 받았을 때가 아닌 1990년대에 들어서 했다.
“속가에 있을 때 사업도 했고 참 여러 일들을 하면서 바쁘게 살았었어요. 하지만 돈버는 재주도 없었고, 또 사람에 대해 실망할 일이 많아 힘들었죠. 그러다 출가를 했습니다. 출가하고자 했을 때 어머니께서 3일 동안 굶으시면서 반대 하셨지만, 제 뜻을 굽히시지는 못하셨습니다. 저도 불가와의 인연은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계를 받게 될 줄은 몰랐어요.”

성주 스님은 마치 소설을 읽어주듯 출가 전 자신의 옛날이야기들을 전했다. 그리고 지금 정말 행복하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저는 하루하루 더 행복해지기 위해 공부도 많이 하고 또 그동안 해왔던 것처럼 포교와 봉사활동도 열심히 해 나가려고 해요.”

춤사위로 법문 전하는 스님
성주 스님은 출가 전 사업가로서도, 또 암벽등반·수석수집 등 취미가 다양했었다. 그리고 1980년 중반 계를 받은 후부터는 불교와 관련한 배움에 심취하게 된다.
우선 해동불교범음대학에서 전통의식인 범패를 배웠다. 범패는 석가여래의 공덕을 찬미하는 노래로 절에서 재를 올릴 때 부른다. 이어 한국법사불교대학에 입학해 공부를 이어갔으며, 금강예술대학에 입학해 3년 동안 전수자 과정까지 이수했다.

“해동불교범음대학에서 범패와 더불어 바라춤을 수료했고, 이후에는 작법무에 매료돼 대한불교법화종 본찰인 통영 안정사의 진하 스님의 상좌로 들어가 배웠어요. 진하 스님은 작법무 무형문화재 9호인 해강 스님 상좌셨고, 작법무 준 보유자셨거든요. 결국 진하 스님 건당(양자)으로 들어가 다시 계를 받았습니다. 2001년이었죠. 이후 영산제, 예수제, 수륙제 등 10년 동안 돌아다니며 선보였습니다.”
성주 스님은 장승사와 청양군사암연합회 행사시, 또 외국을 다니며 범패·바라춤·작법무 등을 통해 포교활동을 펼치고 있다. 특히 외국에는 최근까지 스승인 진하 스님과 함께 다녔으며, 스승이 입적한 후인 3년 전부터는 혼자서 다닌다.

“말레이시아에 해외 포교원을 세웠고, 범패와 작법무 등 불교의식을 통한 포교 활동을 하고 있어요. 특히 이런 활동을 토대로 올 5월 예술단을 창단했고 ‘장승사 어우리예술단’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장승사 어우리 예술단’은 장승사 불자, 성주 스님의 사제 등으로 구성돼 있고 단원은 20명이다.  
“예술단 창단에 맞춰 ‘장승사 봉사 동아리 모임’도 결성했어요. 4월이었고, 이는 예술단 창단에도 큰 도움이 됐습니다. 예술단 활동과 봉사활동을 열심히 해 나가려 합니다. 참여하고 계신분들이 모두 적극적이셔서 잘 될 것 같아요.”

승사와 소중한 인연을 맺다
공주가 고향인 성주 스님이 청양에서 불사를 하게 된 이야기를 소개한다.
성주 스님은 출가 후 서울에 머물며 배움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1990년 초반 보령으로 내려와 6년간 지내며 불사를 전했다. 그러던 중 청양으로 왔다.

“친하게 지냈던 한 비구니 스님과 지금 장승사가 위치한 땅 주인이셨던 심종록 거사께서 인연이 있으셨는데, 그 스님이 저를 이곳과 인연을 맺어줬습니다. 3570여 제곱미터의 사찰부지까지 무상으로 주시며 와서 불사를 하길 원하셨죠. 결국 증여 받은 곳에 대웅전을 짓고, 지금 생활하는 곳은 구입해서 들어왔죠. 2003년도에요. 청양은 와 본 적 없는 곳이었지만, 정말 좋더군요. 기도도량으로 정말 좋은 곳이에요.”
이렇게 청양에서 불사를 시작한 성주 스님은 자신에게, 그리고 신도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하루하루 노력하며 생활했다. 특히 차비만 있다면 어디든지 가 불교의식을 통한 포교활동을 펼치며, 또 봉사동아리 회원들과 함께 봉사도 실천하며 생활하고 있다.

“그동안도 행복했지만 조금 더 행복하기 위해 봉사동아리, 예술단을 창단한 것이에요. 예술로서 즐겁게 한마음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성주 스님은 이야기 끝에 “좋은 말이든 나쁜 말이든 결국은 자신에게 돌아온다”며 “아기를 혼 낼 때도 나쁜 말로 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아침에 눈을 뜨면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라고 말하란다. 그러면 모두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 것이란다.
춤을 통해 법문을 전하는 성주 스님은 노래도 수준급으로 ‘속세 인연에 대한 참회’를 노래한 음반도 냈다. 또 2003년 서울문학을 통해 ‘어머니’와 ‘늙은 아낙네의 기다림’, ‘아가는 백의 관음보살’이란 시로 등단 할 정도로 글 솜씨도 소문이 나 있다. 서각에도 재주가 있다. 

“돈으로 하는 것은 못해요. 하지만 몸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다할 수 있어요. 예술단 활동이든 봉사든요. 봉사에 동참해 주는 인연이 돼 주길 부탁드리고 싶네요.”
대웅전 앞마당에 있던 앙증맞은 화초들과 졸졸졸 물이 흐르던 약수터, 멍석과 투박한 나무·돌 등이 어우러져 멋스러움을 자아냈던 손님맞이 사랑채. 장승사의 모습이다. 아름다운 공간에서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생활하고 있던 성주 스님과의 즐거운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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