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4 15:03 (수)
우리의 이웃 - 장평면 구룡리 정월례(63) 씨
상태바
우리의 이웃 - 장평면 구룡리 정월례(63) 씨
  • 이순금 기자
  • 승인 2011.07.11 10:27
  • 호수 9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글 배우니 신기한 세상이 펼쳐졌어요”

오늘 만나볼 이웃은 요즘 하루하루가 너무 재미있고 신기한 세상에서 사는 것 같다고 말하는 정월례(63·장평면 구룡리) 씨다. 정씨는 지난 4월부터 5월까지 열린 제7회 전국 문해학습자 편지쓰기대회에서 전국 최우수상을 받는 영예를 안았다. 수상 소식을 들은 지 어느 덧 한 달 이상이 지났지만 정씨는 아직도 꿈만 같고 가슴이 두근두근 떨린단다. 예순이 넘은 늦은 나이에 시작한 한글 공부에 푹 빠진 정씨의 이야기다.

“우리 함께 공부 합시다”
정씨는 지난 해 2월부터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웃 30여명과 함께이다. 그리고 그는 이야기 중에 하루라도 빨리 공부를 시작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말을 전한다.
“3년 전부터 이장님이 한글 공부를 해보라고 권유했는데 대부분이 안한다고 하시더군요. 창피하다고요. 시간이 흘렀고, 안되겠다 싶어 지난해에 공부이야기가 나왔을 때 제가 먼저 이름을 적어 신청했죠. 그리고 함께 하자고 주변 분들을 설득했습니다. 그렇게 시작해 다행히 올해까지 배우고 있습니다.”

정씨는 60여년 넘게 한글을 모른 채 살아왔지만 큰 불편은 없었단다. 그러다 지난해 2월 한글을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재미있고 신기한 세상이 눈앞에 펼쳐지더라고 말한다.

“살면서 한글을 몰라도 큰 불편은 없었던 것 같아요. 특히 결혼 후에는 남편이 모든 것을 잘 챙기는 성격이어서 제가 신경 쓸 것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공부를 시작하고 보니 정말 재미있더라고요. 늦은 나이라 조금 힘들었지만 가능한 결석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렇게 상도 탔네요. 선생님에게 감사하고, 묵묵히 도와준 남편에게도 고마워요.”

한글공부를 시작한 지 몇 개월 후 정씨는 자신들을 가르치던 문해교사 남순기  씨로부터 전국 편지쓰기대회가 매년 개최된다는 소식을 들었고, 언젠가 출전 해 봐야겠다는 마음을 가졌었단다. 그러다 올해 출전해 초등 중급 부문 전국 최우수상을 수상하게 됐다.

“작년에 보니까 4월 경 편지쓰기 대회가 있더라고요. 그 생각에 올 대회에 나가기 위해서 미리 내용을 생각해놨죠. 30여 년 넘게 함께 생활하시다 세상을 떠나신 시어머니에 대한 마음을 담은 내용이었어요. 상을 받았다고 했을 때 잘못 들었나 했을 정도로 놀랐고 기뻤습니다. 상을 타러 서울을 갔는데 6200여 통 중에 최우수상을 받았다는 소리에 또 놀랐지만 좋았어요. 축하와 격려 많이 받았습니다.”

농한기에는 낮에 또 농번기가 되면 밤 시간을 이용해 한글을 배운지 1년 4개월여, 이제 정씨는 한글을 읽고 쓰는데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 정도가 됐다.
“학생 대부분이 거의 고령이지만 정말 열심히 하십니다. 지난해에 이어 계속 공부 할 수 있어 감사하고, 내년에도 배울 수 있었으면 하는 소망입니다.”

식구들 북적북적 ‘행복’
매일 매일 예습과 복습을 잊지 않을 만큼 한글공부에 열심인 정씨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다. 특히 어른을 공경하며 가족들에게는 헌신을 다하는 사람으로도 알려져 있다. 
정씨는 공주가 고향으로 여덟 살 때 부모가 이혼을 하면서 친척집에서 생활했고, 21살 때 3살 위인 남편 박덕원(66) 씨와 결혼해 장평면 구룡리로 왔다.

“친척어른들께서 막내딸처럼 잘 돌봐주셨고 결혼까지 시켜주셨어요. 지금은 모두 돌아가셨고, 감사한 마음을 열심히 생활하는 것으로 보답하고 있습니다.”
친척 어른들의 사랑을 받으며 큰 어려움 없이 생활했던 정씨는 다만 어릴 때부터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야 했기 때문에 조금은 외로웠다고 전한다. 그래서 결혼만큼은 가족이 많은 사람과 하고 싶었단다. 그리고 그 소원은 이뤄졌다.

“중매였는데 남편이 7남매 중 넷째지만 결혼하면 시어른, 시동생, 시누이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고 하더군요. 두 말 않고 그러겠다고 했고 그렇게 42년을 살았습니다. 시아버지께서는  92세에, 시어머니께서는 82세에 돌아가셨어요. 30여년 넘게 함께 사셨죠.”

정씨의 지인들은 만날 때 마다 “식구들 많아서 어렵지 않냐”고 물어왔단다. 하지만 그는 그 때마다 “북적거려야 좋지, 뭐가 어려워”라며, 오히려 “가족이 많아 행복하다”고 대답했다.

“시집 올 때 시댁도 넉넉하지 않았어요. 논 5마지기 정도가 전부였습니다. 옛날에는 대부분 어려웠고 저도 시집 와서 고생은 조금했어요. 남편을 도와 농사도 짓고 식구가 많으니 이것저것 할일이 많았죠. 하지만 힘들다는 생각보다 순간순간 행복하다는 마음으로 생활했던 것 같습니다. 덕분에 시간이 흐르니 생활도 나아지고 가족들 모두 무탈하게 생활하게 됐고요.”

사랑하며 열심히 살아야죠
정씨는 지난 세월을 이야기 하면서 남편에 대한 고마움을 전했다. 과묵하지만 성실함으로 열심히 일하면서 가족들을 챙기는 데에도 부족함이 없었던 남편 덕분에 어려운 시절을 지나 지금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5마지기였던 논이 지금은 140마지기로 늘었어요. 남편이 워낙 착실하고 또 아이들도 그 모습을 배워 지금 모두 나가서 생활하고 있지만 항상 왔다 갔다 하면서 농사를 돕고 있고요.” 

정씨는 또 남편에게 미안함도 전했다. 바쁜 남편을 도와 요즘은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막내아들을 낳고 하혈로 1년 동안 꼼짝 못했어요. 당시 병원에서 진찰을 하더니 머리에 있던 단추 같은 것이 녹아내렸다고 하더군요. 죽다 살았고 그 때부터 힘든 일은 못해요. 그래도 지금은 많이 좋아졌습니다. 아마도 저희가 마을에서는 농사를 가장 많이 지을 거예요. 남편이 고생하죠. 그래도 남편은 항상 저에게 ‘고생했다’고 말합니다. 남편에게 고맙죠.”

정씨는 남편 박덕원 씨와의 사이에 재성(42)·재석(39)·재건(34) 씨 등 삼형제를 뒀으며, 이들도 모두 마을에서 더 없는 효자로 소문이 나 있다. 각자 한 가정의 가장으로 또 직장 일로 바쁜 중에도 자주 고향에 들러 농사를 돕거나 부모의 건강을 살피고 있기 때문이다. 

“가족 건강이 가장 큰 행복인 것 같아요. 앞으로도 서로 위하면서 건강하게 생활했으면 좋겠어요.” 
정씨는 시부모 살아생전 유독 귀여움을 받았다고 전한다. 그래서 더더욱 어른들에 대한 그리움이 크고, 그들처럼 자신도 자손들에게 사랑을 전하며 생활해 나갈 것을 전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