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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양인들의 항일운동’ 역사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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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양인들의 항일운동’ 역사를 만들었다
  • 청양신문 기자
  • 승인 2010.12.06 14:29
  • 호수 8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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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후 비밀단체 조직…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
▲ 3·1 운동 이후에도 계속된 청양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행적을 재발굴하고, 역사화 하는 작업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학자들

3·1운동 이후에도 청양출신 독립운동가들은 국내외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펼쳐나갔다. 특히 1910년대 광복회 충청도지부에서 독립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1920년대 대한건국단, 대한독립애국단 등 비밀단체를 조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기도 한다. 충청문화연구소 이성우 교수의 ‘일제강점기 청양인의 민족운동’이란 논문에 의거, 3·1운동 이후 청양인들의 항일운동(광복회․대한건국단․대한독립애국단·예산공립농업학교 비밀결사)을 살펴본다.

광복회는 1910년대 일제의 무단통치로 국내독립운동이 침체된 상황에서 국내의 민족운동세력을 규합해 ‘독립전쟁’을 준비했던 단체다.
충청도지부는 광복회의 대표적인 지부였으며 청양인들은 충청도 지부의 핵심인물들이었다. 기재연, 김경태, 엄정섭, 홍현주, 황학성 등은 충청도지부에서 활동했던 대표적인 청양인이다.

김경태는 구한국 군인으로 한훈과 함께 공주와 청양을 중심으로 의병에 참여했으며, 국망 이후에도 김한종·김재창 등과 조선총독을 암살을 계획했으나 사전에 발각, 피신하기도 했다.
그는 또 광복회에서 군자금의 모집과 광복회 행형부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의협투쟁에 앞장서 1918년 1월 김한종과 함께 친일부호였던 도고면장을 처단하기도 했다.

홍현주는 기재연과 함께 청양을 중심으로 장평면 화산리 중석광에서 물건을 파은 일로 직업을 삼으며 주변지역 정보를 광복회 충청도지부장 김한종에게 제공하는 활동을 펼쳤다.
엄정섭은 청양·부여·공주 지역의 자산가들에게 군자금을 모집했다.
광복회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청양인은 한훈이었다. 한훈은 홍주의병 투쟁 중 전사한 외숙의 유언을 듣고 홍주의병에 참여했다.

그는 1915년 결성된 광복회에 참여, 전라도 지부장을 맡았다. 1916년 5월 친일부호였던 보성의 양재성과 벌교의 서도현을 처단했으며, 전라도 일대의 광복회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그러나 1918년 광복회원들이 체포되어 광복회가 와해되자 만주로 망명했다.
그는 1920년 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조선독립군사령부(광복단결사대) 지원을 약속받고 귀국해 1920년 4월 서울에서 광복단결사대를 조직했다. 광복단 결사대는 모병과 암살을 목적으로 한 비밀결사였다.
이를 위해 임시정부와 만주에 요원을 보내 군사훈련을 받게 하고 조선총독과 정무총감을 비롯해 일제고관과 민족반역자, 조선인 형사 등을 처단하고자 했다.
한훈은 같은 해 5월 김상옥의 암살단과 연합해 미국의원단이 남대문역에 도착할 때 조선총독 및 정무총감 등을 처단할 계획을 수립했다. 그러나 미의원단이 도착하기 하루 전 일제의 예비검속에 의해 체포됐다.

광복 비밀단체 이끈 청양인
대한건국단은 1919년 말 김영진이 국내에서 독립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조직한 비밀결사였다.
조병채, 임종구, 이완백은 대한건국단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청양인이다.
특히 조병채는 김영진과 함께 대한 건국단을 조직하는데 핵심적인 인물로 중국 길림에 있는 길림군 정부 독판 겸 총 사령관 김좌진을 협조해 조선을 독립시킬 목적으로 자금을 모집해 김좌진에게 전달하려는 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대한건국단은 자금을 모집하는 과정에서 임시정부와의 연계를 갖고 활동하기도 했다.
임종구와 이완백은 조병채․김영진 등과 함께 공주․부여․금산․서울 등지에서 수차례에 걸쳐 군자금 모집 활동을 펼쳤다.
대한독립애국단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한 비밀단체이다.

애국단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통제 역할과 만세운동 추진, 한인관리퇴직동맹 결성 등을 추진했다.
문봉의, 서승렬, 정상길 등 청양인들은 애국단 충남도단의 주요임원이었다. 본부의 재무감독이었던 문봉의는 이시우와 함께 청양․예산․논산 일대를 중심으로 충남도단 설치에 주력했다. 이들의 노력에 의해 1919년 11월 청양에 청양군단이 설치되었다. 청양군단은 서승렬과 정상길이 맡았다.
청양군단은 임시정부의 선전활동과 자금을 조달하며 임시정부 연통제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1920년 1월말 강원도단이 발각되고 충청도단이 발각되면서 해체됐다.

청양출신인 박정순과 한정희는 소위 ‘예산농업학교독서회사건’으로 알려진 예산공립농업학교 비밀결사의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예산농업학교 학생이었던 한정희는 정종호, 강봉주 등과 함께 독서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독서회를 기반으로 1932년 5월 사회주의 이념을 기초로한 사회를 건설한다는 목적으로 ‘좌익협의회’를 조직했다.

박정순과 한정희는 1932년 6월 학교측이 일요일에도 불구하고 권농일이라는 이유로 등교를 시키자 ‘학생동원의 부당성과 한인학생들의 차별정책 철회’ 등을 주장하며 동맹휴학을 주도했다.
이로 인해 좌익협의회 학생들이 퇴학처분을 받아 조직이 와해되자 1932년 9월 강봉주, 정종호, 박희남과 함께 예산공산주의학생동맹을 조직해 다시 활동을 재개했다.

이들은 조직의 명칭을 ‘토요회’로 변경하고 학생들을 규합하기 시작했으나 같은 해 11월 친일연극상연반대투쟁을 벌이던 중 일제에 발각되어 체포됐다.
이 밖에 의열단원으로 활동했던 윤병구,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던 이세영과 임긍호, 파리장서활동을 전개했던 김덕진, 임경호 등이 대표적인 청양출신 독립운동가들이다.

이성우 교수는 “청양인의 독립운동은 다양한 형태로 전개됐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며 “이들에 대한 자료발굴과 올바른 연구가 이루어져한다”고 지적했다.

 프리랜서 정재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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