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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가까이 문안드리며 살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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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가까이 문안드리며 살고 싶었어요”
  • 이순금 기자
  • 승인 2010.06.07 11:28
  • 호수 8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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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이웃 - 화산2리 꽃뫼마을 신현수 사무장
오늘은 ‘부모 가까이에서 아침저녁으로 문안드리며 생활하고 싶어 귀촌한 효자 아들’을 소개한다. 더욱이 그는 귀촌한 후 가족들을 위해서는 물론 마을 주민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찾아 솔선수범하고 있다. 장평면 화산2리 꽃뫼마을 신현수(43) 사무장이다.

오늘은 ‘부모 가까이에서 아침저녁으로 문안드리며 생활하고 싶어 귀촌한 효자 아들’을 소개한다. 더욱이 그는 귀촌한 후 가족들을 위해서는 물론 마을 주민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찾아 솔선수범하고 있다. 장평면 화산2리 꽃뫼마을 신현수(43) 사무장이다.

늘 그리웠던 부모와 고향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도시로 떠나서 오랫동안 부모님과 떨어져 지냈어요. 그래서였는지 부모님 곁이 그리워지더군요.”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현재 생활하고 있는 장평면 화산리가 고향인 신 사무장은 2남 3녀 중 장남으로 화산초와 장평중·부여고등학교 졸업 후 안산으로 가 직장 생활을 했다. 

“2년 정도 직장을 다니다 전문대학에 입학 했고, 이후 공주대 산업과학대학 축산학과에 편입해 학업을 계속했죠. 졸업 후 다시 예전 직장에서 일하다 고향으로 왔어요.”
그는 꼼꼼하며 일을 찾아서 하는 사람이었다. 특히 직장에서 책임자로 근무하다 보니 평상시는 물론 명절 때 조차도 고향에 올 수 없을 정도로 바쁜 일정을 보내야 했단다. 그래서였는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만 갔고, 결국 고민 끝에 회사정리 후 고향 행을 결정했다. 2002년 봄이었고, 다른 가족들은 그 해 겨울 뒤를 따랐다.

“고향이 늘 그리웠고 특히 부모님 가까이에 살면서 식사라도 함께 자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효도가 아닐까 생각했어요. 내려오기로 마음먹은 후 가장 힘들었던 것은 아내를 설득하는 것이었고, 다행이 뜻을 따라줬죠.”

귀촌 3년 되기까지 ‘무소득’
직장 생활을 할 당시 신 사무장은 아무 걱정이 없었다. 누구에게나 인정을 받았고, 가족들도 어려움 없이 행복하게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농촌생활을 택했다. 소망하던 부모와 한집에서 생활하면서다. 하지만 생각만큼 쉽지는 않았단다.  

“내려올 때 집 정리한 돈이 있었는데 빚을 갚는데 대부분 썼어요. 부모님께서 1987년부터 양돈을 하시면서 진 빚이 좀 있으셨거든요. 그러고 나니 수중에 돈이 얼마 없더군요. 궁리 끝에 밤농사를 생각했죠. 산은 있었고, 묘목 값만 있으면 됐으니까요. 약 9만9000여 제곱미터 규모로 시작했습니다. 부모님 집에 살면서 돼지도 키우고 밤농사도 지었어요.”

그는 밤농사 3년이면 생활비를 충분히 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10년이면 억척스럽게 일하지 않아도 즐기며 생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생각일 뿐이었다.
“3년까지 소득이 없었고, 부모님께 생활비를 타서 써야했어요. 덕분에 아내도 농사일을 도우며 옷 가게 운영으로 생활비를 보태야 했죠. 4년째 겨우 1000만 원 벌었고, 그 때 잠시 귀농을 후회했죠.”

특히 그는 귀농 3년째까지도 도시의 여러 회사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고 농촌생활이 어렵다보니 ‘다시 떠날까’하며 면접을 다녀오기도 했지만, 마음을 다잡고 떠나지 않았단다.

꽃뫼마을 사무장을 맡게 되다
“부모님과 3년간 함께 생활하다 바로 옆으로 분가 했어요. 부모님께 계속 의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분가란 경제적으로도 독립 한다는 것을 뜻하는 데 막상 분가하니 소득도 많지 않았고, 그렇다고 또 손을 벌릴 수 없어서 밤도 팔러 다니고 여러 일을 했어요. 4년 째 밤농사로 1000만원 번 것도 그 때문이었어요. 그렇게 조금씩 소득을 얻을 수 있었죠.”

어렵게 밤농사를 지어도 수입은 뻔했고 따라서 그는 농사지은 밤으로 묵이나 술 등 가공식품을 만들어 팔아볼까도 했단다. 또 농사일과 함께 낮에는 기름 배달과 밤이면 대리운전까지 하며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그런 중에 화산2리 꽃뫼마을 이춘복 이장이 사무장 제의를 했고 그 일을 맡게 된 것이다. 2008년 8월이었다.

“이장님에게 어려움을 자주 상의하곤 했었는데 어느 날 사무장을 맡아보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해 보겠다고 했어요. 그리고 바로 기름 배달은 놨고, 대리기사는 두어 달 전까지도 했어요.”
꽃뫼마을은 영농조합법인이 구성돼 있고 신 사무장도 조합원의 한 사람이다. 특히 사무장을 맡으면서 그는 조합원은 물론 지역민의 소득창출을 위해 이장을 도와 열심히 일하고 있다.

“사무장을 처음 맡았을 때 무척 힘들었어요. 지금은 조금 익숙해 졌죠. 꽃뫼마을은 네 번의 맥문동 축제와 맥문동 마스크 팩, 맥문동 차 티백 발명특허를 통한 판매로 지역민은 물론 도시민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현재 체험관 옆에 400여 제곱미터 규모의 가공공장을 계획하고 있어요. 이곳에서 8월 말쯤이면 차 가공품을 생산할 수 있을 것 같고 주민들의 소득 창출에도 기여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신 사무장은 일을 스스로 찾아서 하는 성격이다. 이에 이춘복 이장은 “말 할 필요가 없어요. 알아서 일 처리를 다 해 주니까요. 그래서 저는 복덩이라고 해요”라고 말한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자
“귀농 후 경제적인 것도 어려웠지만 더 힘들었던 것은 올 1월 부모님 두 분이 3일 간격으로 암 수술을 받으신 거였어요. 어머니는 직장암, 3일 후 아버지께서 식도암 수술을 받으셨죠. 지금은 경과가 좋아지셨지만, 그 때는 힘들었어요. 이후 하시던 양돈을 다 정리하셨습니다.”

그는 또 자녀들이 시골에 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왜 여기로 왔냐’며 ‘함께 놀 친구도 없고 답답하다’고 말하는 것에 가슴이 아팠다고 말한다. 지역민은 물론 대부분의 귀농귀촌인들이 겪는 이야기다.
“앞으로 가족들 모두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

현재 처음보다는 규모를 줄인 6만6000여 제곱미터에 밤농사를 지으며, 꽃뫼마을 사무장을 맡아보고 있는 신현수 사무장과 공부방 프렌차이즈 제3교실을 운영하는 박미옥(41) 씨 부부는 슬하에 만호·효진·병호 등 2남 1녀를 두었으며, 부모인 신득우(68)·임영숙(63) 씨 집과 100여 미터 거리에 주거지를 마련하고 아침저녁 문안을 하며 행복하게 생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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