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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랑이 가장 큰 격려이자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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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랑이 가장 큰 격려이자 힘’
  • 이순금 기자
  • 승인 2010.05.29 16:17
  • 호수 8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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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이웃 - 청남면 대흥리 김순규·정진수 부부

▲ 이들 부부는 어려움 속에 가족간 사랑이 더욱 더 돈독해 진 것 같다고 전했다.
오늘은 ‘가족 사랑이 있어 살면서 겪지 않아도 될 어려움을 견디며 행복하게 생활하고 있다’는 사람들을 소개한다. 청남면 대흥리 김순규(51)·정진수(50) 씨 가족이다.

청남장평 수박농사 원조
우선 이들은 청남·장평이 수박주산지가 될 수 있도록 기틀이 된 주인공이라고 불린다. 아무도 하지 않던 시설하우스를 이용한 수박농사를 25년 전 시작했고, 그것이 모태가 돼 청남·장평지역이 수박주산지로서 면모를 갖췄기 때문이다. 이들의 수박농사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아산리 출신인 김씨는 고향에서 중학교까지 마치고 서울로 가 전자제품 수리 기술을 배웠고 이후 서울에서, 또 부여로 와 3년간은 전자제품 대리점을 운영했다. 그리고 대리점 운영 시 부여 출신 정씨를 만나 1983년 결혼 후 아산리로 왔고, 1985년부터 수박농사를 시작했다.

“수박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는데 우연히 수박 모 500포기를 얻어 노지에 심었더니 잘 됐고 거기서 자신감을 얻었죠. 하우스 6동으로 시작해 현재는 10동을 짓고 있어요.” 김씨의 말이다. 
이들이 수박농사를 시작할 당시인 1985년만 해도 청남·장평 일대에는 수박농가가 거의 없었다. 더욱이 시설재배는 유일했으며, 주변에서는 ‘미쳤다’고만 했을 정도다. 

“청남·장평 합쳐도 시설하우스 수박 재배가 처음이었고, 또 제가 대리점을 하면서 보증을 섰는데 잘못돼 8촌 형과 맞보증을 서 얻은 돈으로 하우스를 지어야 할 만큼 어렵다 보니 말렸죠. 하지만 첫 해부터 잘하는 모습을 보고 이웃들이 수박농사를 짓겠다고 나섰어요. 2년째부터는 농협에서 계통출하를 시작했고, 그러자 아산리와 대흥리에서 속속 수박을 하겠다고 하더군요. 결국 6년 뒤 청남이 수박주산지가 됐습니다.”

더욱이 이러한 김씨의 소문은 친구들 사이에도 퍼졌고, 친구 중 한 명으로 장평이 고향인 이은국 씨도 김씨에게서 수박농사 법을 배워 지역에 보급하는 등 수제자가 됐다.
“친구가 당시 버섯, 약초재배 등을 했는데 잘 안됐어요. 그러던 중 수박 이야기를 듣고 하우스 6동을 세 얻어서 배우며 수박농사를 시작했었죠. 다행히 잘 돼 다른 농가들도 따라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청남 장평이 수박주산지가 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김씨 부부는 이렇게 아산리서 수박농사를 짓다 12년 전 대흥리로 이사 왔고 이후에도 계속 수박재배를 하고 있다. 최고 18동이었던 하우스를 10동으로 줄여서다. 

감당하기에 너무 큰 시련
재미있게 일했고 그래서 행복했다는 이들 부부. 그러나 이들에게 큰 시련이 닥쳤다. 수박농사 10년 만인 1995년 10월 28일, 초등학교 1학년이던 둘째를 데리러 학교에 갔던 김씨가 5톤 트럭에 받히는 사고였고, 그 사고로 김씨는 사지마비라는 고통을 겪게 된 것이다.

“저는 차 안에 있었고 아들이 책가방을 가지러 가는 도중 5톤 트럭이 아들을 피하다 제 차를 덮쳤어요. 아들도 허벅지 뼈가 부러졌고, 저는 경추를 다쳤죠. 나중에 들었는데 아들이 피를 흘리면서 아버지 죽었다며 차로 왔고 그 소리에 사람들이 제가 사고를 당한 것을 알았다고 해요. 1년 동안 입원했다 퇴원해 통원치료를 했어요. 퇴원하려 하자 의사들이 죽을 수도 있다고 했지만 아내는 저를 간호하느라 농사는 물론 아이들을 돌볼 수 없었고, 그래서 죽더라도 집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김씨는 3남 7녀 중 장남이다. 누나가 여섯이고 일곱 번째 귀한 아들로 태어났다. 그런데 사고가 났고, 이 후 그는 도움 없이는 움직이지 못하는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사고 낸 차량이 무보험이어서 보상도 제대로 못 받고 정말 암담했었어요. 또 남편 사고 후 수박농사도 모두 포기해야 했기 때문에 생활도 힘들었고요. 그러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해서 남편 도움으로 제가 수박농사를 시작했습니다.”정씨의 말이다.

사고 전 김씨는 원예전업농으로 선정 돼 5000만원을 지원 받기로 결정 됐었다. 이후 사고가 나자 부인이 대신 교육을 받고 원예전업농 지원을 받을 수 있었고, 그 지원금을 받아 하우스 10동을 짓고 새 출발을 할 수 있었다. 사고 2년 후부터다.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어요. 아내에게 농사짓는 법을 설명 해 주는 것이 전부였죠. 다행이 사고 3년 후 대흥리로 이사 오면서 컴퓨터를 배워 세상과 소통하고 있습니다. 아내가 가족들을 책임지고 있어요. 미안하고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가족 때문에 살 수 있었다
평범한 가정에 불어 닥친 사고는 자칫 한 가정을 무너뜨릴 수도 있을 만큼 큰 타격을 줬다. 하지만 강인한 어머니 정씨가 있어 이들의 가정은 행복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루에 농약을 10통까지 지고 일을 해야 했어요. 그래도 남편이 몸은 움직일 수 없지만 이것저것 가르쳐 줘서 농사도 지을 수 있었고, 또 아이들도 착하게 잘 자라줘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아버님께서도 관절 때문에 한쪽 다리가 불편하신데도 하우스까지 오셔서 일을 거들어주시고요.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정씨의 말이다.

올해 많은 농가들이 이상기온으로 농작물 피해를 입었다고 호소하지만 다행이도 이들이 농사지은 수박은 잘 됐다.
“다쳤을 때 제 처지를 어떻게 할 수 없어 우울증을 겪기도 했어요. 그런데 아내와 가족들이 열심히 옆에서 사랑으로 보살펴 줬죠. 특히 아내는 신혼도 없이 시아버지와 14, 17, 20살 먹은 시동생·시누이들 돌보며 생활했고, 행복해지려고 할 때 제가 사고까지 당해 지금까지 고생만 하고 있지만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고 잘합니다.”

이들의 바람은 가족들의 건강과 두 아들 모두 사회에 나가 제 역할을 잘 해 주는 것이다.
“10년 전 쯤 만해도 1년에 몇 차례씩 가정 방문 의료서비스가 있었어요.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없어져 문의 했더니 규정이 바뀌었다고 하더군요. 움직일 수 없는 장애인들을 위한 배려가 조금만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면에 배치된 사회복지사님들은 최소 1급 장애인들이 어떤 모습으로 사는지 돌아다니며 봐 주셨으면 해요. 주민들이 느낄 수 있는 복지행정이 됐으면 좋겠어요.”김씨의 말이다.

장애를 입으면 제일 먼저 친구, 부인, 자식이 떠난다고 하지만 자신은 모두가 곁에 있어 행복한 사람이라는 김씨. 그리고 결혼 후 어려움의 연속이지만 긍정적인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는 정씨. 이들부부는 부친 김인선(88) 씨를 봉양하며 서정(28·직장인)·현정(23·청양대 재학) 씨 형제와 행복하게 생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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