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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중심 서비스 우선 ‘가온치과 맹명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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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중심 서비스 우선 ‘가온치과 맹명호 원장’
  • 이순금 기자
  • 승인 2010.03.22 09:41
  • 호수 8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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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위기 일하는 사람이 희망이다-출향인편
건강하고 가지런한 치아를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도 있지만 요즘은 자연치아와 가장 비슷한 색상으로 가지런하며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도록 만들어 주는 심미보철을 이용하기도 한다.
오늘은 이렇듯 치과관련 최고의 전문성을 가진 치의학 박사 한 명을 소개 한다. 자신이 운영하는 치과병원을 방문하는 환자들이 ‘새로운 치과문화를 경험하며 차별화 된 의료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또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치과병원을 국내를 넘어 세계의 중심에 우뚝 세우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가온치과병원 맹명호(46·천안시 성정동) 대표 원장이다. 남양면 대봉리가 고향인 그를 만났다.

건강하고 가지런한 치아를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도 있지만 요즘은 자연치아와 가장 비슷한 색상으로 가지런하며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도록 만들어 주는 심미보철을 이용하기도 한다.
오늘은 이렇듯 치과관련 최고의 전문성을 가진 치의학 박사 한 명을 소개 한다. 자신이 운영하는 치과병원을 방문하는 환자들이 ‘새로운 치과문화를 경험하며 차별화 된 의료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또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치과병원을 국내를 넘어 세계의 중심에 우뚝 세우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가온치과병원 맹명호(46·천안시 성정동) 대표 원장이다. 남양면 대봉리가 고향인 그를 만났다.

‘의사를 꿈꾸다’
그는 고향에서 남양초(구 사양초)와 동영중을 졸업 후 유학을 떠나 천안 북일고와 단국대학교 치과대학을 졸업했다. 그리고 의사의 꿈은 고교 때부터 꾸었던 것 같다고 전한다.
“부모님께서 농사를 지으셨고 생활형편은 넉넉지 않았어요. 또 5녀3남으로 식구도 많았고요. 하지만 제가 여섯짼데 천안으로 진학하자 아예 이사를 하실 정도로 교육열은 높으셨죠.”

고향인 남양면에서 농사를 짓던 그의 부모는 1979년 맹 원장이 고교에 진학하던 해 함께 고향을 떠나 천안 유량동에 자리를 잡았고, 이후 농사를 지으며 정성껏 자녀들을 뒷바라지 했다.
“당시 형, 누나들도 벌이가 없었기 때문에 정말 두 분 고생 많이 하셨어요. 특히 어머니는 농산물을 시장에 직접 내다 팔기까지 하시는 등 더 고생하셨고, 그 탓인지 자주 아프셨어요. 다른 가족들도 그랬고요. 형편이 어려워 병원비 내기도 힘든데 왜 그리 아픈 사람이 많던지, 그 모습을 보면서 의사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치과대학에 진학했죠.”

의학도가 된 후 그는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보태고 싶었지만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고 전한다. 당시는 아르바이트 일도 든든한 배경이 있어야 가능했었고,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농사를 돕는 것이 전부였단다. 그리고 부족한 부분은 차츰 사회인으로 자리를 잡아갔던 형, 누나들의 도움으로 채워졌다고 말한다. 그렇게 1989년 대학을 졸업한 그는 공중보건의를 거쳐 1992년 ‘맹명호 치과’를 개원했다.

잘 되던 병원 접고 ‘유학’
“가족들의 도움으로 63제곱미터 규모의 작은 공간에서 개인병원을 시작했어요. 그리고 8년간 병원을 운영했는데 아이엠에프 때도 상승곡선을 그릴 만큼 잘 됐죠. 그러다 2001년 7월 모든 것을 접고 미국 터프트스 치과대학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당시 맹명호 치과는 ‘천안에서 제일 손님이 많다’고 할 정도로 잘 되던 곳이었지만 맹 원장은 병원을 접고 유학을 떠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에게 ‘미친 것 아냐’라며 우려의 말을 전했단다.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고 떠났습니다. 대학병원과 같은 큰 치과병원을 운영하는 것이 제 꿈이었고, 또 2000년대가 되면 우리나라도 선진국 대열에 오를 것 같아 그러려면 더 실력을 쌓아야 겠다 했죠. 초등학교 1, 3학년이었던 우리 아이들에게도 좋은 기회다 싶었고요. 그렇게 떠나 미국에서 보철과 전문의 과정을 수료하고 2004년 7월에 귀국, 다음해 모교에서 치의학 박사를 받았습니다.”

유학을 떠날 당시 그의 나이는 서른아홉 살, 그는 유학생 중 최고령이었고 미국의 학생들은 ‘과연 잘 견딜 수 있을까’라며 그를 걱정하기도 했단다. 하지만 그는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마지막 프리젠테이션에서 보철과 역사상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고, 학교에서는 그를 그곳에 머물게 하기 위해 제의를 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한국을 떠났을 때처럼 이번에는 미국의 유혹을 뒤로하고 3년 만에 귀국했고 이후 6개월 동안 준비해 2005년 1월 ‘가온치과병원’을 개원하게 된다.


 
세상의 중심…가온치과
‘가온’은 ‘세상의 중심’이란 뜻을 가진 순 우리말로, ‘가온치과’를 세상의 중심에 세우겠다는 맹 원장의 소망이 담겨있다.
“가온이 문을 열 때 전문의 9명을 포함 모두 60명이 함께했고, 지금은 전문의 10명을 포함 모두 75명이 고객을 맞이하고 있어요. 임플란트와 보철을 비롯한 대학치과병원과 같은 과가 모두 개설돼 있고, 특수클리닉으로 장애인·외국인 진료실, 검진에서 치료․임시치아까지 한 번에 마칠 수 있는 원스톱 인플란트 시스템, 심미보철 분야도 개설돼 있습니다.”

가온에는 특히 치과병원으로 드물게 마취과 전문의가 상주해 노약자 및 치과 공포증 환자에게 수면진료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외에도 가온에는 수술 관람실과 세미나 및 교육실, 환자들을 위한 쾌적한 실내 공간, 원거리에서 출퇴근하는 직원들을 위한 기숙사까지 갖추고 있다. 이러다보니 치과병원으로서는 종합병원이나 다름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고, 환자 외에 1년이면 평균 500여명 이상이 가온 견학을 다녀가곤 할 정도다.

“세미나 및 교육시설이 갖춰져 있다보니 국내 뿐 아니라 치과관련 외국 업체들도 많이 다녀가요. 세계적인 큰 회사에서 저희병원을 트레이닝 센터로 지정도 했고요. 앞으로도 가온의 가족들은 계속 노력해 갈 것입니다.”
맹 원장은 ‘환자가 싫어하는 직원은 병원을 떠나야 한다’라고 말할 정도로 환자 중심 서비스 우선을 강조한다. 또 ‘환자를 위한 최선의 진료와 서비스로 만족을 넘어 감동을 줘야 한다’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 이를 위해 병원홈페이지에 ‘고객불만접수’코너를 운영하는 것은 물론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달에 두 번씩 친절 서비스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이 때문에 가온은 지역 기관들의 친절서비스 벤치마킹 장소가 되기도 한다.
“친절하지 않으면 함께 일할 수 없다고 했고, 잘못한 직원들은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을 내기도 하죠. 잘못한 직원을 대신해 제가 사과를 드리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고요. 앞으로도 그렇게 해 나갈 것입니다.”

내일을 준비하는 사람 
맹 원장은 앞으로 전국 5-10개 지점을 개설해 수준 높은 치과 의료서비스를 펼쳐나갈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 첫 번째가 올 해 말이나 내년 초, 서울이 될 것이라고 귀띔한다. 또 지난 해 천안시와 국제교류를 맺고 있는 중국 석가장시 사절단이 병원을 방문한 것을 계기로 교류를 넓혀 가고 있으며, 아시아는 물론 미주·중동에도 진출 계획을 세워두고 있다. 이와 함께 치과기공사·위생사 등을 양성하는 치과관련 전문교육기관을 설립해 치의학 발전에 한 몫을 하겠다는 계획도 세우고 있다. 이러다 보니 주변에서는 그를 일컬어 ‘내일을 준비하는 치의학 박사’라고 말한다. 

가온치과는 개원 5년여 만에 천안지역은 물론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청양을 비롯해 인근 지역에서도 찾아오는 치과병원이 됐다. 앞서 설명했던 맹 원장의 확고한 의지와 가온 가족들의 노력 덕분이다.
특히 맹 원장은 지금처럼 가온이 자리할 수 있게 된 데에는 ‘끊임없는 교육과 쉽지 않은 업무에도 최선을 다해주는 직원들 덕분’이라며, 준비된 직원들에게 고맙다고 말한다.

맹 원장은 ‘변하지 않으면 퇴보하게 된다’고 말한다. 변화에 발맞춰 새로운 것을 창출해야만 뒤처지지 않고 더욱 좋은 진료 서비스를 환자들에게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투자하고, 공부하며, 변화를 꿈꾸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게 가온치과병원은 세계의 중심 병원으로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다.
‘환자 중심 서비스 우선’ 실천으로 세상의 중심 가온치과병원을 만들어 가고 있는 직원들. 그리고 그 곳의 수장인 맹명호 원장은 1990년 결혼한 부인 구영아(46)씨와의 사이에 두 딸을 두고 있으며, 어린시절 받은 도움과 사랑을 가족들과 환자들에게 되돌려 주며 열심히 생활하고 있다.

“어머니께서 지금 87세신데 아직도 유량동에서 농사를 지어 자식들 나눠주는 재미로 삼고 계십니다. 아버지께서는 2004년 돌아가셨고요. 가족을 대하는 정성으로 더 열심히 노력 하겠습니다.”
맹명호 원장은 천안시 치과의사협회장을 역임했으며, 성균관대학교 강북삼성치과 외래교수, 바르게살기운동충남협의회 부회장, 천안시청소년통합지원 운영협의회 위원, 대한치과의사협회 경영정책위원, 치과 HIV 감영예방연구회장 등을 맡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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